성인 열 명 중 일곱 명이 일 년에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고, 생산된 책의 70퍼센트가 판매되지 않고 반품처리 된다고 한다. 반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는 도처에 흔하고, 영화관 앞에 줄서는 사람들 수가 백만을 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읽는' 시대가 가고 '보는' 시대가 왔나보다. 활자매체가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고 피로하게 한 걸까. 아니면 삶이 지루하고 피곤해진 사람들이 영상이 제공하는 가상세계 속에서 잠시나마 대리만족과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는 걸까.
아무리 '보는' 시대라 하지만 영화도 결국 생각과 상징과 기호들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보는 '대상'은 같아도 그것을 읽는 '도구'는 저마다 다르니까. 특히 영화는 즉각적으로 혹은 즉물적으로 다가오는 사물이나 사건들에서 상상의 깊이나 이미지의 다양함은커녕 그저 얕은 감각만으로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 대중문화의 그 기이한 단순성과 획일성은 거기서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 책은 철학이라는 '도구'로 영화 읽기를 시도한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정서에 호소하고 무의식에 말을 걸며 서슴없이 다가오는 장점을 갖고 있는 영화와,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성이고 있는 철학사상'과의 소통을 위해 저자는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의 대중화가'가 '철학의 저속화'로 몰고 가지만 않는다면, 대중 매체는 철학과 대중을 연결시켜주는 가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책은 영화를 매개로 하여 희망. 행복. 시간. 사랑. 성. 죽음 등 삶에 관한 보편적 주제들을 '철학적'으로 읽어낸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큐러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키에르케고르, 싸르트르, 하이데거, 마르셀, 프로이드, 바타이유, 엘리아데, 비트겐슈타인, 라캉 등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과거의 사상과 전통 속에서 '고상하게 군림'하던 철학이 범속한 대중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한다. 뿌리 내릴 곳 없어 서성이던 인문학이 마침내 영화라는 멋진 텃밭을 만난 듯 잘 어울린다.
인간소외의 공간이자 수많은 '타인들의 지옥'인 은 절망 속에서 '믿음이란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라는 믿음의 역설적 성격을 읽어낸다. 에서 존재의 상실은 왜곡된 욕망 때문이며 '존재의 기쁨'을 되찾으려면 부질없는 욕망에서 빠져나올 것을 주문한다. 에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닌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직관 그리고 미래의 기대 속에서 하나의 불변하는 통일체로서의 인간의 시간'을 말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불려나온다. 에서는 인간의 무력함에서 새디즘을, 에서는 인간의 양심과 과거와의 화해를 이끌어낸다.
삶에 대한 성찰은 원래 문학의 몫이었지만 문학이 해왔던 역할을 이제는 영상이 하는 시대가 되었다. 소설이라면 수십 장의 묘사를 해야 할 사건도 영화는 한 장면으로도 강렬하게 보여준다. 압축된 이미지와 서사의 빠른 전개 속에서는 더욱 성능 좋은 인식의 도구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영상시대일수록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은 철학으로 연마된 인문학적 '밝은 눈'일 터이다.
bipasory@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