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옛 도시의 기억

공교롭게도 진행 중인 작품의 핵심 스태프(staff) 들은 거의 경기도 일산에 모여 산다. 그래서 일산을 자주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일산은 한마디로 단언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개발'과 '보존 '이 나름대로 조화로운 풍경을 이루는 일산은 여러 분야의 많은 예술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며칠 전, 그곳에 거주하는 스태프들이 모여 밤새 내리는 비를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침을 맞았다. 비 갠 이른 아침, 동대구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는데, '행신역'의 한가로운 풍경이 아득한 '노스탤지어(nostalgia)'를 주었다.

철로를 가로질러 높이 치솟은 인도용 터널과 철탑을 닮은 구조물들은 메트로폴리스적인 이미지이지만, 철로 주변에 무성한 야생풀들과 플랫폼 너머로 훤히 트인 시야가 주는 느낌은 지극히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인공의 '구조물'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만나면 어김없이 파고드는 이러한 정서적 상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산이나 강, 바다 등 순수 자연형상을 통한 感想(감상)과는 또 다른 느낌, 그냥 노스탤지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이 감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의 중장년층 중에서도 도시에서 생활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런 유사한 감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당시는 아무리 도시라 해도 동네주변에는 어김없이 산이 보이고 개울이 흘렀다. 시내 한가운데만 아니면 집 마당에서든 골목길에서든 산이 보였고 동네 길을 조금 벗어나면 논밭과 개울이 있었다. 여름 철, 동네 이발소에 앉아서 보던 거울 속 먼 산의 모습과 매미소리, 나무 전봇대 위로 흘러가던 양떼구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것이다.

구조물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들이, 옛날 도시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이 혼재된 감상을 준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현실복제가 아니라 현실을 뛰어넘는 환상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과거는 단지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환상을 제공한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런 맥락에서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 그러한 '환상'을 보너스로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올여름 휴가 때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로 떠나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여행길에서 저마다의 고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줄 '환상 찾기'를 권유해 본다.

전소연(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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