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동안 칼을 갈았다.'
무림(武林)이었다면 이미 최고의 고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도 그의 칼질에 따라 고기 맛이 달라진다. 그는 '정육지존'이다.
17년 동안 하루도 칼을 품에서 떼어내지 않고 살아 온 김준오(38) 씨. 김 씨는 대구시내 갈비식당에서 쇠고기를 뼈에서 발라내고 분류하는 일을 한다. 그는 7자루의 칼을 갖고 다닌다. 다양한 크기의 칼은 모두 독일제다.
이제는 도마 위에 올라 온 갈비짝의 크기만 봐도 어떤 소인지 알 수 있다. 칼을 갖다 대기만 하면 육질과 등급까지 파악해 낸다. "황소는 뼈가 크고 단단한 반면, 거세한 소는 황소에 비해 뼈가 작고 부드러운 편입니다. 암소라고 해서 다 좋지는 않죠. 새끼를 많이 밴 암소는 질기기 때문입니다."
대형 갈비식당에서는 고기를 발라내고 분류하는 사람을 '육(肉)부장'이라고 부른다. 중소규모 식당에서는 주방장이 육부장을 겸하기도 한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다. 김 씨에게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친구의 일을 도와주려고 도축장에 갔던 김 씨는 일이 재미있어서 칼을 잡았다. 대학을 다니고 있었지만 재미없는 공부보다는 칼질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고 맛까지 결정되는 고기 다듬는 일이 재미있었다. 돈맛도 알았다.
갈비식당에서 육부장과 주방장 생활을 12년 했다. 서울의 유명갈비식당 '삼원가든'의 육부장 노릇도 했다. 그후 칼을 갖고 다니면서 '프리랜서'로 일한 시간이 5년. 그렇게 17년이 흘렀다.
"그렇게 후회는 하지 않아요. 무슨 일이든 적성에 맞으면 좋다고 생각해요."
갈비 한 짝을 다듬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개그맨 김경식 씨를 닮았다. "그런 소리를 많이 듣죠. 그가 대중을 웃긴다면 나는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잘 웃기죠."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엔지니어링회사에 다닌다는 거짓말로 6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속였다. 대신 예쁜 아내와 두 아이를 가진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었다. "아내는 돈을 많이 버는 줄 알고 나와 결혼했죠." 이날은 한 식당의 개업식에 나왔다. 마침 그의 일을 도우러 나온 아내가 곁에 있다가 그게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으면서 지나쳤다.
재미만 있었을까. "처음에는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어요." IMF는 그에게도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허리띠 풀어놓고 갈비를 먹을 만한 여유가 없을 때였다. 손도 수없이 베었다. 칼질하느라 물집이 잡혀 고생도 많이 했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칼을 잡아야 했다.
"지금은 이런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뼈가 붙어 있는 갈비손질이 가장 어려워요. 칼을 잘못 넣으면 갈비살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살에 붙어 있는 기름의 깊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칼을 잡고 고기 속에 넣으면 육질과 등급이 딱 손에 들어온다. 그렇게 되기까지 4, 5년이 걸렸다.
30kg이 넘는 갈비 한 짝을 제대로 다듬어서 내놓는 데 4시간이 걸린다. 요즘은 인기있는 갈비식당에서는 갈비짝을 매달아놓고 고기를 다듬는 모습을 손님들에게 직접 보여준다. 신선한 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광고효과까지 노린 것이다.
식육식당을 차리는 것이 당장의 목표다. 예전에는 삼원가든 같은 큰 갈비식당을 차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규모만으로는 승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도·소매로 고기를 파는 식육식당이 실속이 있다. 70% 정도의 기반을 닦았다. 2009년에는 작은 꿈이나마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대구에서 김 씨처럼 갈비식당을 다니면서 고기를 손질해주는 '육부장'은 10여 명 정도. 그 중 김 씨는 최고다. "최고가 아니라면 그만둬야죠."
그는 고기를 손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비법으로 만든 양념도 만든다. 사실 고기 맛은 좋은 고기를 고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김 씨 같은 '정육지존'이 고른 질 좋은 고기를 결을 거스르지 않고 잘 손질해 숙성시켜 내놓는 고기라야 비로소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다.
글·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 '肉부장'이 권하는 맛있는 쇠고기
김 씨는 시내 갈비식당에 가서 고기를 먹는 대신 자신이 직접 고기를 사서 집에서 구워먹는다. 식당에서는 주는대로 먹고, 속으면서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갈비전문식당에서는 수입산과 한우에 대해 원산지 표시를 한다. 그러나 한우와 수입산은 맛의 차이가 확연하다. 김 씨로부터 간단하게 좋은 쇠고기를 고르는 법을 들었다.
한우는 기름색깔이 하얗고 육질도 선홍빛을 낸다. 고기사이에 지방이 섞여있는 정도인 마블링이 규칙적인 것이 좋은 고기다.
도축장에서 바로 잡아서 내놓은 고기보다는 2, 3일 숙성시킨 쇠고기가 더 맛있다.
식당에서도 바로 내놓으면 질긴 맛이 나기 때문에 손질한 고기를 하루 정도 숙성실에서 숙성시킨 후 내놓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자.
1등급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마블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육안으로 보이는 정육상태, 즉 육질도 확인해야 한다.
한우와 수입산을 판단하는 또 다른 근거는 고기를 구웠을 때 나오는 육즙이다. 아무리 고급 냉장육이더라도 수입산은 육즙이 거의 나오지않는다. 냉장 수입육은 이미 가공된 정육이다. 김 씨의 표현을 빌자면 '냉발'을 많이 받아서 육즙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우는 그에 비해 엄청난 육즙이 나온다. 수입산에서 나오는 것은 육즙이 아니라 얼렸기 때문에 나오는 물이다.
대구에서는 갈비와 갈비살이 가장 인기있는 쇠고기지만 서울에서는 등심이 가장 잘 팔린다. 그래서 대구의 식당에서는 잘 팔리는 갈비를 찾는 편이 좋다.
서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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