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보다 더 크고 우주보다 더 큰 인간들이 돈이 없어서 아파하며 쩔쩔매고, 외로움 속에서 혼자 죽어가는 꼴에 화가 난단다. 그래서 욕이라도 하고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니?"
장선우 감독의 영화 '화엄경' 가운데 '욕쟁이 의사'의 대사이다. 구원의 상징인 어머니를 찾아 길을 떠난 선재가 "아저씨는 왜 욕쟁이가 되었어요?"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허리를 다쳐 쩔쩔 매면서도 쉬지 못하는 영감에게 부아가 돋고, 제 집구석 뒤주의 쌀이 떨어졌으면서도 치료비를 낸다며 쭈뼛거리는 할멈에게 욕지거리가 쏟아진단다.
그런 거룩한 분노나 연민 때문은 아니지만, 딱 한 번 '욕쟁이 의사'가 된 적이 있었다. 수련을 마치고서 중소병원에서 갓 근무를 할 때였다. 예쁘장한 소녀가 기관지 천식으로 입원했다. 마침 보호자들도 젊은 교사 부부여서인지, 의학적인 설명에 대한 이해가 빨랐고 치료 방침에 대해서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따라줬다. 퇴근 뒤 느지막하게 찾아오는 부모들을 일부러 기다렸다가, 각종 문헌이랑 도표까지 챙겨주면서 꼼꼼하게 설명과 상담을 해줬다. 드디어 퇴원할 때, 삐뚤거리는 필체로 꼬마 숙녀가 직접 적은 감사하다는 쪽지가 든 과일 바구니를 받고서는 쑥스러움 반에 뿌듯함 반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퇴원 뒤, 외래진료로 이어지면서 약속한 날짜를 어기는 것은 기본이고, 애써 챙겨준 예방약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청맹과니인 아이의 이모가 아이를 데려와서는, 다짜고짜 그냥 기침약만 처방해 달란다. 처음에는 아이의 상태나 투약 유무 등을 좀 챙겨오든지, 직접 보호자가 전화를 해주거나 하다못해 쪽지에라도 적어 오라고 사정도 해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드디어 분을 삭이지 못한 내 입에서 험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며칠 뒤 외래진료실로 아이의 아빠가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찾아왔다. 그러나 출구를 찾지 못해 들끓고 있던 나의 분노 앞에서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아이를 정말 아꼈고, 의사라는 입장을 넘어서 정말 동료애를 느낄 정도로 보호자들을 믿었다."던 나의 항변에 그는 도리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서 되돌아 갔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그 아이를 진료실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안다. 진정 환자에 대한 안타까움에서만이 아니라, 내 노력을 몰라주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속보이는 분노요, 제 분을 이기지 못한 치졸한 욕지거리였음을 말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에서 예전 저마다의 그리운 '욕쟁이'에 대한 애틋한 사연이나 흐뭇한 추억들을 만날 수 있다. 결코 굴욕감이나 자책감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대신에 괜히 흐뭇하고 자꾸만 웃음이 배어 나오던, 그 기분 좋은 낭패감으로 말이다. 제대로 된 욕쟁이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온전한 욕쟁이가 되기는 더더욱 어려운가 보다.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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