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했다!'
이건 칭찬인가 하면 나무람이고 또 핀잔이기도 한 묘한 말이다. 핀잔일 때는 '말 같지도 않은 말', '억지 부리는 말' 따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나무람일 때, '말 잘했다!'는 이른바, 아이러니가 되는 셈이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뒤집어서 비꼬는 것이 된다.
요즘 우리들이 신문을 읽고 TV를 보면서 무심코라도 자주자주 '그 말 잘한다!'라는 아이러니를 내뱉게 되는 것은 웬 까닭일까? 그나마 큰 자리,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발언하는 것을 들을 때, 드물지 않게 시민들이 '그 말 잘한다.'라고 말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사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신분이 높을수록 그들 말이 땅바닥을 뒹굴고, 진흙구덩이 속에 내리박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일반 시민으로서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자니 예부터 자주 써온 말이 절로 생각난다. '身言書判(신언서판)' 바로 이 한마디다.
하지만, 오늘날 그게 잊히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나마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그런 것 같아서 마음 아프다. 그래서 새삼, 警句(경구)라고 해도 좋고 箴言(잠언)이라고 해도 좋을 '신언서판'을 되새겨 보자.
몸가짐과 말과 書藝(서예)와 그리고 판단력, 이 넷이 다름 아닌, '신언서판'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인간의 능력과 인품을 매기는 '4대 기준'이 되어 왔다. 특히 '선비'며 벼슬아치에게서는 절대의 기준이었다.
한데 오늘날 書(서)가 컴퓨터의 자판 찍기에 밀려나면서 덩달아서 '신언판'의 셋도 한꺼번에 퇴락하고 있는 것 같다. 言(언)을 말이라고만 했지만 그렇게 단순치는 않다. 언은 말의 내용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논리도 '언'이고 따라서 말투, 말버릇도 물론 '언'이다.
더욱이 言行(언행)이라면서 언이 행동이며 행위와 짝 지어서 사용된 것은 매우 큰 뜻을 품고 있다. 언행일치라면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이 곧 행동이요 행위가 바로 말임에 대해서도 시사하고 있다. 말을 떠난 행동이 없듯이 행위를 떠난 말이 없다는 것도 십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身(신)과 짝지어서 身言(신언)이 되면 몸가짐이며 행실이 곧 언어요 언어가 다름 아닌 處身(처신)임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언행'이나 '신언'이나 어차피, 말이 인간이고 인간이 곧 말임에 대해서 일러주고 있다.
말은 인간의 로고스요 理法(이법)이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 판국에 누군가 말을 함부로 내뱉다시피 아무렇게나 하고 즉흥적으로 토한다면 어떻게 될까? 막말을 해대고 쌍소리 비슷한 말도 해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나라의 큰 자리며,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그런다면 나라꼴은 어떻게 될까?
물으나마나다. 답은 아주 뻔하다. 그의 행실도 처신도 인품도 파탄을 빚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시민들에게서 '그래 말 한번 잘한다.'는 아이러니를 들을 적마다 나라꼴이 구겨질 게 뻔하다.
言責(언책)이란 말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다. 그건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공동체의 이익이나 복리를 위해서 마땅히 할 말 해야 하는 책무를 의미한다. 공중을 위해서 중론을 모아서 말해야 하는 책임이라고 해도 좋다. 한데 또 다른 하나는 말한 사람이 그가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져야하는 책임이다.
이 두 가지 의미의 언책이 제대로 구실을 다하고 또 지켜질 것을 전제하고서야 公人(공인)은 공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신언서판'이 살고 그의 인품도 지켜진다. 그렇지 못한다면 아예 입 닫아야 한다. 정말이다. 함구무언해야 한다.
오늘날은 여론의 시대다. 중론과 공론의 시대다. 그건 제 혼자의 생각을 잘난 척하고는 떠벌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公人(공인)들의 공적인 발언은 시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남들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바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차라리 현명할 것이다. 그들에게야말로 침묵이 금일 것이다.
김 열 규(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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