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내가 진 빚이 너무도 많구나
평생을 등짐 져
갚아도 다 못 갚을
그 빚을 얼마나 더 지려고
오늘을 또 살았다
거느린 식솔들이야 緣의 굴레 썼다지만
가난한 주변머리로 쓴
고작 몇 줄의 詩
그것이 드넓은 천지에
무슨 보탬 되겠는가
새삼 사는 일이 숙연해지는 오후 한때
눈 감고 생각느니,
산같이 우람한 저 빚
그 아래 풀벌레처럼 엎드려
오오, 哭, 곡할밖에.
일찍이 시대의 빙판을 노래한 '겨울강'의 시인이 일상 속에서 시의 진정성을 캐고 있습니다.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릴케의 말이 아니더라도, 일상성의 시를 꼲는 제일의 준거는 리얼리티라 할 것입니다.
저녁이면 만상의 표정이 깊어집니다. 그 저녁 한때를 시인은 사는 일의 숙연함에 젖어 듭니다. 생각하면 사람의 죽살이가 다 빚이지요.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사는 만큼, 이틀을 살면 이틀을 사는 만큼 늘어나는 빚. 빚더미는 곧 우람한 산더미가 됩니다. 이 세상 천지에 무슨 보탬이 될지 종잡지 못할 몇 줄의 시까지도 빚이라는 대목에서 한참 눈길이 머뭅니다. 숱한 못 자국이라도 보이는 듯 해서요.
그러나 생각을 이렇게 뒤집어 보면 어떨까요? 현생에 지는 빚은 곧 전생에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한순간도 마음 편히 내려놓지 못한 채 지고 있는 등짐 자체가 바로 그 빚을 갚는 일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한낱 '풀벌레처럼 엎드려/ 오오, 哭, 곡할밖에' 없는, 하릴없는 빚짐의 삶, 빚 갚기의 삶이여.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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