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속에서 큰달맞이꽃 무리가 두런거린다. 언제 날아들었는지 악착같이 강변에 희고 노란 꽃을 밀어 올리는 개망초, 하늘타리, 쉽싸리, 큰달맞이꽃 씨앗들의 힘. 마침 드문드문 솟은 별 사이로 하늘의 숨구멍처럼 노란 달이 떴다. 오늘 저녁엔 달빛에 흥건히 젖어보겠다는 듯 큰달맞이꽃들이 바람에 겅중거리며 부산하다. 때마침 수풀 속에서 일만 마리의 풀벌레들이 날개를 떨어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는 저녁이다.
이 강변에서 10년을 살았다. 생면부지의 타향이었던 밀양의 남천강 강변. 아내의 직장을 핑계 삼아 저 강물의 표정을 지켜 볼 수 있었던 건 나에게 분에 넘친 호사였다. 걸음마를 하던 첫째가 아장대던 강변, 둘째와 연날리기를 하고, 인라인을 함께 타던 저 고수부지. 이름 없는 풀꽃들이 강변에서 평수를 넓혀가는 사이 벌써 10년이라니! 얼치기 아빠에서 불혹의 학부형이 되는 사이 나는 어디까지 흘러온 것일까?
생각해 보면 나는 오랫동안 내 욕망에 매달려 아이들을 외롭게 했고, 아내를 힘겹게 했다. 학위를 위해 대구의 원룸에 떠나 있었던 몇 해 동안 아내는 사력을 다해서 직장과 육아에 전념했으리라. 피붙이 하나 없는 외딴 곳에서, 아내는 겨울이면 고뿔 앓는 핏덩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출근해야 했다. 내가 허욕의 낚시 바늘에 찔려 피 흘리는 사이 그렇게 시간은 물처럼 흘렀던 것이다.
지금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저 강물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는 없는 법이라고. 그 후 직장을 옮긴 뒤 고속도로에서 엑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나는 시간과 싸우며 살지 않았던가. 그렇게 바퀴 위의 삶은 나를 앞만 바라보게 하였다. 청도를 지날 때 감꽃이 언제 피는지, 휙휙 스쳐가는 산등성이의 떡갈나무가 언제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용 말처럼 푸푸 더운 김을 뿜는 쇳덩어리 위에서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차를 버리고 기차와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한다. 처음엔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교통카드를 어떻게 구해 쓰는지도 몰라 당황했다. 그러나 승용차를 버리고 기차와 버스를 타자 갑자기 풍경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날줄과 씨줄의 인연들이 내 곁에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런 가게가 있었나? 오늘 저 아낙의 토마토는 좀 물렀는걸! 여기의 가로수 가지는 전지가 필요하군! 그렇게 물상과 사람들이 나를 정점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길이 열렸다.
바퀴 위에서 달리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던가. 풍경을 잃고 욕망을 향해 질주해 본들 나는 이생의 강물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배를 물결 위에 붙이고 흔들리는 마분지 조각처럼, 하류를 향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을 뿐.
마른 수수깡처럼 허약해진 아버지 또한 어느 날 저 하류의 끝에서 바다로 흘러가 버릴 것이다. 살아계실 때 한 번 더 찾아뵙는 것이 효도임을 잘 알면서도 난 여전히 바쁘다. 아니, 바쁘다고 믿고 싶어 한다. 기림사 종광 큰스님의 법문처럼 '한 가지 일을 해결하러 가서 열 가지 일을 만들어 오니 어찌 바쁘지 않을 것인가?'
내게 필요한 것은 바퀴 위의 삶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뚜벅뚜벅 한 발자국씩 걸으며 사람들의 땀내음을 호흡하는 것이다.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왼발과 오른발의 균형을 맞추며 세상의 관성에 흔들리지 않는 법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시간이 되는 대로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자주 저 강변에 나가는 것이다. 강물은 가르치지 않는가? '그대, 왜 그렇게 빨리 하류로 가기 위해 하루를 소모하는가?'라고.
헷세는 '싯타르타'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선지자의 마음을 이렇게 전한다. '이 강물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라! 강물로부터 배우라!'고. '강물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비밀, 나아가 모든 비밀까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정말 귀 기울이면 지금도 들린다. 어설픈 잡문을 쓰는 이 순간에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뚜벅뚜벅 흘러가는 강물소리가 찰박찰박하다.
신기훈(시인·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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