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 빛깔은 어찌 이리 푸른지요! 숲은 또 어찌 이리 깨끗한지요! 전라도의 어느 차밭에서 휴가를 한다는 이, 강원도 설악산 밑 어느 민박집에서 휴가를 한다는 이, 가족들과 함께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친지들의 소식을 들으니 8월에는 너도나도 여름휴가를 떠나는 계절임이 실감납니다.
바다가 가까운 우리 수녀원에도 휴가 손님들이 더러 오는데 지난해부터는 '해변가족피정'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가족들끼리 자연과 벗하여 산책도 하고 등산도 합니다. 성서나 시집을 읽는 시간도 가지고 기도시간에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도 갖습니다. 나뭇잎이나 조가비로 서로에게 사랑의 카드를 써 보기도 하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저는 휴가기간 중 며칠을 할애해 동료 수녀 4명과 같이 어느 목사님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집안일과 수업을 즐겁게 나누어 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일종의 '봉사휴가'였던 셈이지요. 쉬는 가운데서도 책을 많이 읽으면 독서 휴가, 명상을 주로 하면 명상 휴가, 관광을 주로 하면 관광 휴가, 잠시 무언가를 배운다면 배움 휴가로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수사님은 휴가기간에 수도원마다 다니면서 자신의 여러 기술을 이용해 이것저것 수리를 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휴가를 휴가답게 하려면 바쁜 일을 떠난 여유를 지니되 자신의 내면을 한껏 충전시킬 수 있는 쉼이 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기껏 휴가를 다녀와서 너무 힘들었다고, 안 가니만 못했다고 불평하며 '다시 쉬어야겠다'는 푸념을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하필 휴가 기간 중에 환속하려는 동료를 보며 어느 수행자가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수도자는 휴가 때 자기관리를 더 잘해야 한다고, 참된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알고 자신을 제대로 다스릴 줄 아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만 휴가할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참, 올 휴가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저에게 물으셨지요? 연초에 저는 병환 중이신 노모를 위해 시간을 쓰다 보니 휴가 기간이 남아 있질 않답니다. 이 여름엔 느티나무가 잘 보이는 조그만 침방에서 부채를 들고 더위를 식히면서 좋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더러는 시도 쓰면서 '부분휴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휴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슬픈 이웃을 위한 기도도 잊지 않으려해요. 얼마전 캄보디아에서 참변을 당한 가족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수년 전 모처럼 벼르고 별러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해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참변을 당한 중국민항기의 희생자들도 생각납니다.
돗대산에 해마다 깨꽃이 많이 피는 이유는 희생된 가족들이 선물로 사들고 온 깨들이 모두 땅에 쏟아져서 그리 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도 깨만 보면 그분들의 생각이 난답니다. 어쨌든 올여름 휴가를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마음엔 맑음을 얼굴엔 밝음을 담아오시어 그 맑고 밝은 빛으로 주위를 밝혀주시면 저도 더불어 행복하겠습니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휴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약간 지니셔야죠? 노는 데만 열중하지 말고 종종 폭넓은 기도도 바치시길 바라고요. 아름다운 유적지를 보면 사진만 찍지 말고 수첩을 꺼내 중요한 것을 기록하는 습관도 키워가시면 합니다. 잔소리가 많아 죄송해요.
'휴식의 공간이 어느 곳이든지/ 함께하는 이들이 누구든지/ 우리의 휴가길에는/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서 환해진 미소와/ 서로 돕고 양보하는 마음에서 피어오른/ 잔잔한 평화가 가득하게 하십시오//……넓디 넓은 바다에서는/ 끝없이 용서하는 기쁨을 배우고/ 깊고 그윽한 산에서는/ 한결같이 인내하는 겸손을 배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숙하게 하십시오// 항상 곁에 있어 귀한 줄 몰랐던/ 가족 친지 이웃과의 담담한 인연을/ 더없이 고마워하며 사랑을 확인하는/ 은혜로운 휴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자작시 '휴가 때의 기도'에서)
이해인 수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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