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8·15 해방과 원폭 투하

몇 해 전 히로시마 변호사회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날 일본 측 어느 노변호사로부터 색종이 한 묶음을 선물로 받았었다. 다섯 살 때 피폭 현장을 경험했던 그는 오랫동안 재일교포와 귀국한 조선인 피폭자들의 권리 구제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온 사람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피폭 잔해 건물이 남아 있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가면 색종이로 접은 종이학들이 제단 곳곳에 쌓여 있다. 그곳에는 이국땅에서 피폭당하여 죽은 식민지 백성 조선인들의 제단도 있다. 피폭지로서 오랜 상처를 안고 있는 히로시마 시민들은 종이학을 접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평화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 변호사 역시 평화를 나누기 위해 색종이를 선물한 것이다.

원폭 투하 당시 37만 명의 도시 히로시마는 피폭 직후 14만 명이 사망했고, 그 중 조선인은 3만 명이었다. 생존한 조선인 피폭자 2만 3천 명은 귀국하였고, 나머지 7천여 명은 일본에 남았다. 이들 재일교포 피폭자들은 고국의 정부와 국민들로부터도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피폭자와 이방인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으며 어렵게 살아왔다.

그 변호사가 일부 일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면서 재일교포 피폭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피폭의 경험 속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호사는 세미나에서 원폭과 평화 문제에 대해 특별발표를 하면서 끔찍한 경험을 생생하게 전하고, 양국 국민들이 평화를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그는 동북아시아의 비핵화, 핵무기 폐지와 피폭자의 원조, 평화 문제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면서, 원폭 투하가 한국의 해방을 빠르게 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감정적인 반일 의식에 매몰되어 있던 나에게 문제를 던져 주었다. 그래서 이맘때면 그가 생각난다.

이제 곧 8·15다. 전범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것으로 일본은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났고, 미국의 보호 아래 번영을 구가했다. 피해자인 우리는 해방을 맞았지만 남북으로 분단되어 동족 사이의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오랫동안 일제 잔재의 폐해로 고통을 받아 왔다.

아직도 정신대 할머니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본 우익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A급 전범들을 숭배하고, 망언을 일삼으며 군국주의의 역사를 복원하려 한다. 이럴 때면 일본이 더 혹독하게 피폭을 경험했더라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적대적인 반일 감정으로 일본의 우경화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꿈꾸는 일본 우익은 오히려 우리의 반일 감정과 분노를 적절히 이용할 뿐이다. 해방 이후 60여 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는 원폭 투하의 수혜자라는 문제를 깊이 고민해 볼 때이다. 우리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정신대 할머니들이 노구를 이끌고 수요집회를 하는 것, 일본의 노변호사가 재일교포 피폭자들의 권리 구제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모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물론 일본은 피폭으로 사망한 히로시마 시민들보다 훨씬 많은 각국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태평양전쟁과 과거 반인도적인 범죄 행위에 대해 철저한 참회와 반성을 선행해야 할 것이다.

어느 때보다 지난 몇 년 동안 남북관계는 북핵 문제로 악화되었고, 긴장 상황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을 앞당겼던 핵이 이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북한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폐쇄 조치가 진행 중이고, 6자회담도 다시 열릴 수 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북한의 완전한 핵불능화 조치 이행, 평화협정 체결 등 갈 길이 멀고, 긴장 국면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 그리고 멀리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아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우리 국민들이 탈레반에 인질로 붙잡혀 이미 2명은 살해되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8·15는 해방을 기뻐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원폭 투하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하고, 생명과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과 테러가 즉시 중지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남호진(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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