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이면 스코틀랜드 왕국의 옛 수도 에든버러는 축제의 현장으로 탈바꿈한다. 세계 최대의 공연예술축제 중 하나인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에는 공연을 위한 대형 극장이 마련되고, 대학 기숙사들은 일제히 관광객들을 위한 숙소로 바뀐다. 교회와 성당, 상점도 예외는 아니다.
길거리는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지 못한 가난한 예술가들의 몫이다. 도시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축제 모드'로 변신한다. 교회의 야외 정원은 관광객을 위한 '바'가 되고 벽면은 온통 공연 포스터들로 그득하다. 8월 5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이번 페스티벌에는 전세계 2천여 개 공연단체가 270여 개의 임시극장에서 저마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지난 5일, 공연 개막일이 되자 프린지 페스티벌의 중심 거리 '하이 스트리트'에는 아침 일찍부터 공연단체들이 공연 홍보를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공연 분장을 한 채 전단지를 나눠 주는가 하면 짤막하게 공연을 축약한 거리공연도 진행된다. 관광객들까지 가세하면서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후끈하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공연팀들의 '로망'이기도 하지만 도시 축제의 성공신화이기도 하다. 특색없는 관 주도의 도시축제가 지자체마다 수십, 수백 개가 난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축제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인 1947년, 전쟁으로 얼룩진 유럽을 문화예술로 재통합하자는 기치 아래 시작된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을 모태로 탄생했다. 전쟁을 피해 독일에서 스코틀랜드로 건너왔던 루돌프 빙이 에든버러의 몇몇 사람과 함께 유럽의 평화와 통합을 기원하는 문화행사를 마련한 것이 에든버러 인터내셔널의 기원이다.
그리고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받지 못한 8개 공연단체가 극장이 아닌 소규모 공간을 극장으로 개조해 공연했던 것이 프린지 페스티벌의 시초다. 주변을 의미하는 '프린지'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같은 탄생 배경은 축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참가작을 엄선하는 인터내셔널 페스티벌과 달리 프린지 페스티벌은 누구에게나 문호를 개방했다. 지금도 프린지협회에 참가비만 내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축제에서 공연할 수 있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1970년대부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 이후 세계 진출을 꿈꾸는 공연단체들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는 아트마켓으로 각광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9년 에든버러에 처음 입성한 '난타'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세계무대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다양한 작품이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특히 2005년 페스티벌에서 가장 먼저 매진됐던 무술 퍼포먼스 '점프'는 2006년에도 주 공연장 중 하나인 어셈블리 홀을 차지하면서 연속 매진기록을 세웠다. 그밖에도 2006년에는 어린이 영어 뮤지컬 '춘향', 스트리트 댄스 퍼포먼스 '묘성' 등 7편이 무대에 올랐다.
올해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국내 작품은 12편. 역대 최대 규모다. 10개 의자를 무대장치이자 배우로 활용하는 '보이첵'(Woychek)을 비롯해 올해는 비보이의 활약도 돋보인다. '스핀 오디세이' '맥시멈 크루' 등은 세계 최정상급 비보이들이 만드는 무대다. 한국 공연단체들의 공연은 연일 매진되는 등 현지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만큼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40여만 명의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며 도시 이미지 형성은 물론 축제 자체로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61주년을 맞은 프린지 페스티벌은 올해 우리 돈으로 1천500억 원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
인구 50만 명의 도시에서 열리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이처럼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프린지 페스티벌이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연위원회가 어떤 공연단체든 일정한 참가비만 내면 공연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젊고 창의력 넘치는 공연 팀들이 대거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재 페스티벌 예산은 공연 참가비 25%, 프로그램 광고수익 19%, 티켓 판매 커미션 25%, 상업적 수익상품 23%, 공공단체 보조금 7%, 국영기업 후원 등으로 이뤄진다.
시 지원 예산은 전체 예산의 2% 정도. 올해 총예산 30억 원 가운데 시 예산은 8천만 원 수준에 불과하다. 예산 30억 원으로 1천500억 원의 수익을 내니, 50배 이상의 이익을 남기는 셈이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홍보마케팅 팀장 래리 해리스(Leroy Harris) 씨는 "에든버러 시의 지원은 교통 등의 인프라 지원이면 족하다."면서 "시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재정 자립이 가능해 축제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코미디와 서커스, 팬터마임이나 퍼포먼스, 무용으로부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셰익스피어 연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연을 우리돈 1만~3만 원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 역시 프린지 페스티벌의 큰 장점이다.
예술성보다 대중성을 강조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공연이 많다는 사실 또한 관객들을 불러모으는 포인트이다. 항상 새로운 실험적 공연을 추구하며 관객들에게 신선한 호기심을 제공한다. 극장을 잡지 못해 길거리 공연을 펼치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연도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대구경북연구원 조지현 박사와 오동욱 박사는 '뮤지컬 산업 연구 보고서'에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을 공연 산업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행사 주최가 공연단체를 섭외하는 방식이 아니라 참가자가 비용을 내고 공연하는 식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또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시장경쟁을 통해 우수 공연작품이나 단체가 선택되고 성장할 수 있는 '테스트 마켓'(Test Market)이 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도 빼놓을 수 없다. 프린지 페스티벌 전체 관객의 30%는 에든버러 주민들의 몫이다.
실제로 축제 기간 동안 에든버러 거리에는 안내 책자를 들고 다니며 공연을 즐기는 주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매년 10편 이상의 공연을 관람한다는 도그아스 맥코럭(Douguas Mccoruack) 씨는 "코미디, 댄스,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골라 일찌감치 예약했다."면서 "프린지 페스티벌은 주민들의 축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프린지 페스티벌 공연 팀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공연 관계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 세계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가장 크다. 100개가 넘는 공연 전문 스카우트 단체가 재미있는 공연을 발굴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고, 세계 각국에서 온 2천여 명의 취재진이 프린지 페스티벌 소식을 지구촌 곳곳으로 전송하기 때문이다.
'난타' '점프' 등도 이렇게 프린지 페스티벌을 통해 일약 세계적인 공연팀으로 도약했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총감독 존 모르간(John Morgan) 씨는 "유력한 공연 디렉터와 프로모션을 초대해 공연팀과 연결시켜 주는 전략이 프린지 페스티벌을 키워온 중요한 전략"이라고 귀띔했다.
에든버러에서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 또 다른 볼거리 '길거리 홍보전'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을까.
전세계 2천50개 공연팀이 공연을 펼치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중심 도로인 로얄 마일에는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한 갖가지 묘안이 속출하고 있다. 이 자체로도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며 축제의 흥을 북돋우고 있는 것.
재미있는 분장이 각양각색이다. 속옷만 입고 알몸으로 팸플릿을 나눠주는가 하면 신부, 기린, 중세 기사 등 특색있는 분장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포스터 붙이기 경쟁도 치열하다. 대구시립무용단 한 단원은 "포스터를 붙이고 돌아서 2, 3분만 지나면 그 위에 새로운 포스터가 붙어 있기도 한다."면서 "때로는 누가 더 높은 곳에 붙이는지 경쟁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팸플릿을 나눠주는 방식도 가지각색이다. 동정에 호소하는 '호소형', 무조건 와보라고 하는 '강요형', 독특한 분장으로 눈길을 사로잡으려는 '분장형' 등 공연 팀마다 다양하다. 아프리카·스코틀랜드·중국·한국 등의 민속 악기도 단골 손님이다.
서커스, 코미디, 행위예술 등 가난한 예술가들의 길거리 공연 또한 페스티벌의 분위기를 북돋우고 있다. 이처럼 길거리 홍보전과 가난한 예술가들의 몸부림이 페스티벌을 찾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더욱 즐겁게 해주고 있다.
최세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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