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계약금 3억1천만 원(위약금 1억 원 포함)을 받고 삼성에 입단한 김재걸은 기대를 한몸에 받던 유망주였다. 그러나 '제2의 류중일'로 촉망받던 그가 백업 요원으로 전락하는데 걸린 시간은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운명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데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프로 입단후 김재걸은 간섭(?) 없는 프로의 분위기를 별 생각 없이 즐겼다. 갑자기 들어온 돈도 조금 있는 데다 김성래, 강기웅, 류중일 등 기라성 같은 내야진이 있어 그들을 넘기 위해 훈련에 매달리기보다 느긋이 차례를 기다리기로 한 것. 김재걸은 매일 경기를 치르는 프로의 중노동(?)을 간과하고 있었다.
류중일의 목부상으로 개막부터 유격수로 선발 출전한 김재걸은 5월까지는 그런대로 버텼다. 그러나 6월 들어 체력이 떨어지면서 무리하게 플레이를 하다 팔꿈치 부상이 찾아왔다. 연일 출장, 체력을 거의 소진한 상태에서 피로는 누적되고 팔꿈치가 아프게 되자 신인이라는 심리적인 부담까지 겹치며 급격히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백인천 감독이 부임한 이듬해 40개의 도루를 기록했지만 타율은 2할2푼대에 머물렀다. 결국 시즌 후 정경배, 김한수, 김태균이 함께 떠난 호주 특별훈련의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타격이 약하고 수비에서도 겉멋이 들어 화려한 플레이만 지향하고 기본기는 소홀히 한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그 여파로 97년 시즌은 설 자리마저 없었다.
2년간의 군복무(공익근무)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 브리또, 박정환, 조동찬에 가려 늘 더그아웃 의자나 지키는 신세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2루타로 우승에 기여한 덕분에 선수생활은 이어갔지만 속칭 '땜빵 인생'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10년 세월이 흘러갔다.
2005년 그는 새내기 사령탑 선동열 감독과 만났다. 그해 동계훈련지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하던 어느날. 김재걸이 연습경기에서 '체크 스윙'으로 삼진을 당하고 풀이 죽어 벤치로 돌아오는데 선 감독이 불렀다. "재걸아, 자신있게 해. 감독이 가만 있는데 누가 뭐라고 그러냐. 타자가 삼진 먹을 때도 있는 거지. 좀 자신있게 해봐."
스스로도 그늘 속의 존재일 뿐이라고 여겼던 김재걸에게는 타자로서 10년만에 듣는 따뜻한 격려였고 관심이었다. 그해 동계훈련에서 김재걸은 가장 열심히 훈련한 선수로 포상을 받았다.
게다가 박진만의 손부상 때문에 개막전부터 선발 출장하는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10년전과 달랐다. 5월 하순에 복귀한 박진만에 다시 자리를 내주기까지 그는 자신의 최고 기록을 남겼다. 또 그해 박종호의 부상으로 대신 출장한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세우고 '걸사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올 시즌도 김재걸은 조동찬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늘 누군가를 대신해 나서지만 훼손된 자리를 보수해 팀에 활력을 불어넣는 그가 어쩌면 진정한 팀의 수호천사가 아닐까?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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