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변시인협회 초청으로 옛 고구려와 발해의 땅인 만주를 다녀왔다. 장춘과 길림, 연길 용정 등을 방문하면서 그곳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옛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 뜻깊은 대장정이었다.
장춘의 '장백산' 잡지사 이여천 부사장과 문인들의 안내로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비운의 삶을 살았다는 위황궁과 거대한 호수 정월담 그리고 삼림공원을 둘러봤다. 밤엔 문화광장을 산책하며 장춘의 야경에 매료되기도 했다. 제갈공명을 기리며 띄운 공명등과 그를 따르며 밤하늘을 나는 형형색색의 연을 올려다보다가 때마침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발견하곤 이국에서의 여독이 한번에 씻기는 듯했다.
길림으로 이동했을 때는 도로변엔 미루나무·버드나무가 늘어선 가로수들이 즐비했는데 우리네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도라지' 잡지사의 전경업 사장을 만나 함께 간 곳은 주몽의 고향마을 동단산성이었다. 산성 주변 마을은 고주몽이 출생 후 성장한 곳으로 산을 오르자마자 유적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찾아온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벌판을 달려오는 주몽의 발말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상에 올라 보니 찬연히 빛났던 고구려의 삼족오 깃발은 간 곳 없고 산불조심이란 깃발이 대신 펄럭이고 있었다. 동단산성 옆으로 어린 주몽을 키웠던 송화강이 엎드려 흐르고 있었다. 모든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 수면 위로 물비늘을 일으키고 있었다.
송화강 유람선상에서 개최했던 '길림 송화강 시낭송회'는 한·중 교류를 통한 길림문인들과의 소중한 만남이었으며 참석자들의 詩興(시흥)은 이태백에 다름 아니었다. 연길행 버스를 탔지만 좌석이 없어 통로의 간이의자에 줄줄이 앉아 6시간을 덜컹거리며 달렸던 기억도 이채로운 추억으로 남는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고 도읍지로 삼았던 돈화를 지나칠 땐 뭉클한 감격에 젖기도 했다. 동모산 자락 넓은 벌판을 가로지르며 호령했던 영웅은 어디로 가고 그의 애마였을 듯한 한 마리 말이 어린 망아지의 잔등을 핥아주며 풀을 뜯고 있었다.
연길로 들어서자 조선족자치주답게 간판 글씨부터가 달랐다. 모든 간판들이 위엔 한글, 아래엔 한자로 뚜렷이 적혀 있었고 한 식당 건물에는 태극기까지 붙여두고 있었다. 이국에서 보는 한글과 태극기는 민족의 자부심과 함께 쌓였던 긴장을 해소시켜 주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옛 우리의 만주땅임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연변의 석화 시인은 만날 때마다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의 굳은 심지를 읽을 수 있었다. 재중동포 3세대인 그는 다음 세대가 중국에 동화되지 않도록 우리 글과 말을 가르치며 전수하는 게 현대판 독립운동이라 했다.
용정의 윤동주 시인의 묘지를 참배하고 시인의 생가를 찾았을 때는 이미 빗줄기가 발등을 적시고 있었는데 한 서린 시인의 눈물 같아 고개가 숙여졌다. 그가 다녔던 용정중학교 내의 기념관에서 확인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의 행적 또한 그랬다. 내리는 빗속에서도 일송정과 해란강은 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 이튿날 연변시인협회에서 출간한 시잡지 '시향만리' 창간호 출판기념회가 연길 백산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여섯 번째 만주기행을 한 바 있으며 한국문단에서는 유일하게 만주땅에 널리 알려진 한 중견 시인의 한국 측 축사에 이어, 그 문예지에 수록된 필자의 시를 나는 직접 낭송하게 되었는데 넓은 행사장을 꽉 메운 조선족 문인들의 표정에서 한민족의 핏줄이 뜨겁게 펄떡이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귀국할 땐 다시 장춘에 들르게 되었는데 남영전 길림신문사 사장께서는 토템사상을 테마로 한 조선족 시인으로 유일하게 중국 시단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분이어서 나마저 자긍심이 솟아올랐다. 만주벌판을 누비며 시대를 풍미했던 주몽과 대조영이 역사의 뒤란으로 물러났어도 그 정신은 아들의 아들 세대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돈화와 길림땅을 스치며 멀리서 삼족오 깃발을 들고 배웅하는 주몽과 대조영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윤미전 시인·대구한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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