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해방될지 알 수 없었지만 양심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0년대, 학생독립운동단체였던 '태극단'에서 활동했던 김정진(82·경북 봉화군) 지사(志士)는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며 말을 아꼈다.
경북 봉화가 고향인 김 지사는 대구상업학교(현 상원고)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이른바 '태극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태극단 사건'은 단장 이상호를 비롯한 26명의 어린 학생들이 비밀결사를 조직, 무장 항일투쟁을 준비하다 붙잡힌 사건. 일제의 혹독한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에 단명과 강령을 가지고 치밀하게 계획된 조직적인 운동이란 점에서 학생독립운동 이상의 민족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김 지사는 태극단에서 비서장을 맡아 친구들을 규합하고 후배들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 "절친했던 서상교가 동참을 권유했어요. 조국 광복을 향한 꿈과 친구와의 의리로 합류하게 됐죠."
그러나 독립운동의 대가는 혹독했다. 태극단은 결성 1년 만에 일본 경찰에 적발됐다. 이상호 태극단장이 붙잡혔고 뒤이어 단원 25명 전원이 체포됐다. "수업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로 형사들이 들이닥치더니 연행해 가더군요. 그리고 2년이 넘도록 빛을 보지 못했죠."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이상호 단장 등 간부 4명이 광복을 전후해 숨졌고, 6명은 당시 미성년자로서는 최고인 단기 5년 장기 10년을 언도받는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김 지사도 단기 2년, 장기 3년을 선고받고 대구경찰서와 대구형무소, 김천소년원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제는 민중봉기를 우려해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고, 김 지사는 20년이 지난 1963년이 돼서야 독립운동 유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1945년, 조국은 되찾았지만 김 지사의 고난은 계속됐다. 광복과 함께 풀려난 그에게 돌아갈 학교가 없었던 것. 상경한 김 지사는 이듬해 성균관대에 입학,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다시 6·25전쟁의 파고에 휘말렸다. "고교도 졸업을 못해 나중에야 명예졸업장을 받았고, 대학마저 전쟁통에 제대로 다니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시절이었죠." 이후 대구상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고향인 봉화로 자리를 옮겨 후학들을 지도했다. 요즘은 태극단동지회장으로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 말년의 정열을 쏟고 있다.
"요즘 부모들은 내 아이만 우선이라는 이기적인 세태가 만연돼 있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이 소신과 열정을 갖고 옳은 일을 위해 투신할 수 있도록 타인을 배려하고 강한 정신력을 키워줘야 합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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