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표절

唐(당)의 문인 王維(왕유)의 '送元二使安西'(안서로 원이를 보내며)에 필적하는 이별시 '送人'(임을 보냄)을 남긴 고려 문인 鄭知常(정지상)은 金富軾(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고자 했으나 정지상의 文才(문재)를 넘을 수 없었던 그의 시기심 때문이었다.

정지상이 '淋宮梵語罷 天色淨硫璃'(절에서 법어가 끝나니 하늘빛이 유리처럼 맑구나)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이에 감탄한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자기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부식은 묘청의 난때 묘청편에 섰던 정지상을 죽였다. 李奎報(이규보)의 '白雲小說'(백운소설)에 나오는 얘기다.

글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대게 자기보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것이 정도를 넘어서면 시기심을 품게 되고 표절이란 도둑질도 하게 된다.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된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의 '악의 축'(Axis of evil)이란 표현이 표절논란에 휩쌓이고 있다. 1999-2004년 백악관 연설문 작성비서로 있었던 매튜 스컬리는 최근 한 시사잡지 기고문을 통해 그 표현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표현은 당초 또다른 연설문 비서였던 데이비드 프럼이 초고에 'Axis of hatred'(증오의 축)이라고 한 것을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실제로 '악'이란 표현을 넣은 것은 자신이라는 것이 스컬리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부시 대통령은 비서의 작품을 가로챈 셈이다.

하지만 가로채거나 베낀다고 자기 재주로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도, 김부식처럼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남의 작품이 자기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규보는 이 사실을 정지상 귀신에게까지 비웃음을 당한 김부식의 菲才(비재)를 통해 멋지게 들려준다.

"김부식이 어느 봄날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버들빛은 천가닥 푸르고 복사꽃은 만점이 붉다)이라고 읊었다. 그러자 정지상 귀신이 나타나 뺨을 때리면서 '천가닥인지 만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느냐? 왜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버들빛은 올올이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다)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나무랐다." 표절은 지금 우리사회에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은 얼굴을 숨긴채 남의 재능의 결실을 도둑질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그것을 달라고 했으니 그나마 양심적(?)이라고 할까?

정경훈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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