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병활동 최한용 선생 90년만에 건국포장

"죽을 때 고향땅도 못밟았는데…"

독립유공자 후손의 10여 년간의 끈질긴 노력이 선대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게 했다.

국가보훈처는 15일 광복절을 맞아 고(故) 최한용 선생을 항일 독립유공자로 인정,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849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최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등 일제의 침략만행이 노골화되자 1906년 경북 영천을 거점으로 활약한 정용기 의병장의 참모로 활동했다. 이듬해 경북 경주 우각전투에서 패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으며 이후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5차례에 걸쳐 '천하에 알리는 글' 등 항일투쟁을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해 옥고를 치렀다.

이런 최 선생의 공적이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은 것은 후손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증손 최재철(80·대구 동구 신기동) 씨가 증조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 우연히 집안 서적을 정리하다 증조부가 의병장으로 활동했다는 행적을 알게 됐다. 1996년 북한에서 펴낸 한말 의병 전쟁자료집에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이 적혀 있는 것도 확인했다.

이후 최 씨는 부산기록정보센터, 대전교육청 자료관, 밀양경찰서, 경북대도서관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증조부의 족적을 찾기 위해 노력, 결국 3차례에 걸친 반려 끝에 10여 년 만에 공적을 인정받게 됐다. 1917년 증조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90년 만이다.

최 씨는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어서 실제로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며 "고향을 떠난 뒤 일제의 감시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땅을 밟지 못한 증조할아버지가 지하에서 크게 기뻐하실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 씨에게 돌아오는 물질적인 보상은 없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손자녀에게까지만 해당하기 때문. 최 씨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불구가 되도록 투쟁하셨던 증조할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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