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언어의 진보?

영화 '화려한 휴가'를 봤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그 줄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눈시울을 뜨뜻하게 적시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학교 밖으로 시위를 하러 떠나는 고등학생들의 눈 밑에 교사가 치약을 발라주는 장면이 특히 그러했다.

영화의 이 사소한 장면은 그 사소함 때문에 빛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막아서도 안 되는 역사의 흐름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오늘날 젊은이들한테 '광주'는 먼 옛날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그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광주'는 여전히 현실이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신군부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민주주의를 지켜온 사람들은 이를 '광주항쟁'이라 부른다.

얼마 전 유력한 대선주자의 한 사람은 이를 두고 스스럼없이 '광주사태'라고 말해버렸다. 놀라웠다. 이 용어는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폭도'나 '불순분자'로 내몰던 자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이미 폐기처분 되었어야 할 잘못된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이 제5공화국 수준이라는 뜻이다.

과거로의 화려한 회귀일 수도 있다. 언어는 의식을 반영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사태'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사태'이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그 이전에 의식을 바꿔야 하고, 또 의식을 바꾸려면 치고 박는 경선 준비보다는 '화려한 휴가'를 몇 번 더 보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무릇 하나의 명칭이란 단순히 사건의 기호에 머무는 게 아니다. 그 사건이 시작할 때부터 마무리될 때까지를 두루 아우르면서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푯대가 되는 것이다.

1894년에 이 땅에 일어난 큰 사건이 있다. 이를 부르는 명칭도 역사학계에서는 다양하다. '동학농민혁명'이나 '갑오농민전쟁'이 최근에는 주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 사건은 '동학란'이었다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슬그머니 '동학운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 현대사에는 '혁명'이 없었다. 아니, '5·16혁명'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달달 외우고 성장한 세대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한테 잘못 가르쳤다고 사과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독 나를 잘못 가르친 어른들에게 따지고 싶어지는 것일까?

언어는 변화한다. 그것도 그 형태와 의미가 변화할뿐만 아니라 식물처럼 영양분을 먹고 쑥쑥 자란다. 물론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언어도 있다. 때로는 언어에 유기체적 요소가 들어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국전쟁'이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6·25동란'은 우리 눈앞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한편 우리가 떠나보낸 '동무'의 자리를 '친구'가 차지하고 앉아 있기도 하다.

남북교류가 잦아지면서 북한에 출입하는 이들한테 정부에서 누누이 교육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상대방을 부르는 용어다. 북한을 '북측'이나 '북쪽'으로 부르라는 것이다. 왠지 어색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때문에 서로 합의한 언어이므로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두 남북의 정상들이 한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북측'과 '남측'이라는 말로 상대를 부를 것이다.

한때 북쪽을 향해 우리는 '북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불러대던 적이 있었다. 만약에 그 '북괴'라는 말을 지금 누군가 다시 꺼내 쓴다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될 것인가.

1980년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대학생인 우리는 '북괴가 남침하면 우리도 총을 든다'는 벽에 적힌 구호를 보아야 했다. 그 속에는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보이지 않는 외침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해 광주는 무법자들에 의해 온 도시가 빨간색으로 물들어야 했다. 역사는 발전한다는데, 이 참에 한 번 묻고 싶어진다. 언어는 과연 진보하는가?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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