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개문과 장지문이 활짝 열린 대청마루 한 자리를 차지해 가부좌를 틀었다. 멋대로 부는 게 바람일진대, 마치 길을 알고 지은 듯 솔솔 부는 바람이 후텁지근한 습기를 말끔히 앗아가자 청량감이 폐부를 훑고 단전을 스친다. 까짓 세상의 잡사는 내 알 바가 되지 못하는 순간이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 3리 '만산(晩山)고택'의 별당 칠류헌(七柳軒).
방 한 칸이 딸린 이 별채에 앉아 고택의 사랑채와 안채로 눈을 돌리자 쪽문사이로 처마의 곡선이, 돌담 너머로 우아한 한옥 지붕이 도드라진다.
탁 트인 공간에서 고풍스런 멋에 한참을 젖어 있는 동안, 문득 집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부와 외부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전통한옥의 특성임을 안 것은 한참을 지나서였다.
게다가 한옥은 집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주거 공간적인 장점이외 고택일수록 전통문화의 향기도 고스란히 남아있어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하는 체험의 장이 되기도 한다.
사랑채와 안채의 엄연한 공간구분이나 손님전용의 별당, 한옥의 건축학적인 미와 생활동선에 맞춘 구조 등은 모두가 옛 생활을 익힐 수 있는 공부거리들이다.
만산고택은 이런 까닭에 지난해부터 웰빙과 전통문화체험을 원하는 일반인에게 문을 열어놓고 있다. 초록이 싱그러운 두메의 고택에서 유유자적한 안빈의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은 어떨까.
호우를 뿌려대던 비구름이 한 풀 꺾여 반가운 햇살이 비치는 오후. 한 세기 하고도 3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만산고택은 첫 인상부터가 청아하다. 11칸짜리 긴 행랑채 한 가운데 솟을대문을 지나면 널찍한 마당 전면에 제일 먼저 팔작지붕의 5칸짜리 사랑채가 눈에 띈다.
그 단아한 모습에 반해 눈을 어디에 둬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던 차에 낯선 이에 놀란 듯 마당 한 켠 대추나무 가지에 붙은 매미가 요란한 목청을 터뜨린다.
이 때 안채에서 고택을 지키는 강백기(63'姜百基) 씨가 쪽문을 나와 반갑게 맞았다. 만산 강용 선생의 4대손이다. 그와 수인사를 나눈 뒤 만산고택을 둘러봤다.
"아버지, 할아버지에 이어 나도 이집에서 나고 자랐고 제 아들도 이 집에서 태어났지요."
얼핏 보기에도 정갈한 사랑채 처마 밑엔 각각 '만산(晩山)'과 '정와(靖窩)', '존양재(存養齋'타고난 심성을 온전하게 지켜서 덕성을 기르는 곳)'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중 '만산'과 '정와'는 탁본이다. 연유를 물었다.
"'만산'은 대원군이 직접 쓴 글씨로 지금은 서울의 한 박물관에 있습니다."
만산고택은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가옥구조를 보여준다. 사랑채를 중심으로 좌측에 서실, 우측에 별도의 담장을 치고 별당을 두었다.
후손들의 공부방 용도로 지은 서실은 지붕구조가 특이했다. 네 곳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마치 네 면 모두가 지붕면을 이루는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밑에는 어김없이 '한묵청연(翰墨淸緣'고아한 학문을 닦는 곳)'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이 또한 탁본으로 비운의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는 설명이다. 구한말 격랑의 세월을 살았던 인물의 편린들을 고택은 말없이 그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
마당을 돌아 야생화가 곱게 핀 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쪽문을 통과해 들어선 별당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붉은 빛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나무결, '칠류헌'이라 쓴 당호, 푸른 글씨의 주련이 고풍스럽다. '백석산방(白石山房)'과 '사물재(四勿齋)'라는 글귀도 있다. 산방이라 함은 선비의 여유로운 거처를 뜻함이요,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라는 사물은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기둥과 대들보, 마루 바닥재는 춘양목이 쓰였다. 국권을 침탈당한 을사늑약(1905)이후 만산선생이 국운회복을 빌며 학문을 닦던 곳으로 청나라 말 권력자였던 이홍장과 원세개의 글도 보인다.
무엇보다 한점 뒤틀어짐 없이 버텨온 최고 목재 춘양목이 깔린 널따란 '칠류헌' 대청마루에 앉아 고택을 향하면 한옥의 부드럽고 단아한 조형미가 주는 안온함에 휩싸인다. 그 느낌 따라 활개 치며 누워 마냥 게으름을 피워도 좋을 듯싶다.
한참을 머물던 칠류헌을 나와 사랑채 옆 쪽문을 지나면 고택의 안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마당을 둘러싼 ㅁ자형구조에서 남녀유별의 주거공간배치를 엿볼 수 있다. 안주인이 머무는 상방을 중심으로 중방과 하방이 있고 한쪽은 생필품을 두던 곳간이 마련돼 있다.
마루 한 구석에는 식구들의 안녕을 빌며 집과 사람의 일체감을 돈독히 했던 토속민간신앙의 산물인 성주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매년 5월 보름과 추석, 동짓날엔 햇곡과 팥죽을 이 곳에 차려두고 집안의 번성과 무사를 두 손 모아 빌었던 일종의 제단인 셈이다.
"이 곳은 해발이 300m쯤 되기 때문에 여름밤에도 이불을 덮지 않으면 춥고 모기 같은 해충도 드물죠."
안방에 앉아 장지문 밖을 내다보니 후원에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여름햇살을 즐기고 있다. 그 정취에 흠씬 젖어드니 한가로움이 절로 밀려온다. 한옥만이 줄 수 있는 정경이다. 더불어 전통 생활상과 묵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옛 사람들의 마음을 새길 수 있어서도 좋다.
칠류헌 옆 작은 마당엔 널뛰기, 투호, 제기차기, 윷놀이 등 체험자들을 위한 전통놀이시설과 샤워실도 갖춰져 있다.
야생화 수집이 취미인 종부 류옥영(56) 씨가 담장을 따라 심어둔 들꽃과 들풀 구경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며 고택 앞을 흐르는 운곡천에서는 물놀이도 가능하다.
자연과 여유를 벗 삼아 쉴 수 있는 만산고택에서 하루 묵는 비용은 칠류헌이 5인 기준 10만원, 서실이 5만원, 안채가 7만원이다. 아침에 한해 주문하면 고택에서 제공하기도 한다. 1인당 5천원. 문의:054)672-3206
▩만산고택=조선말기 문신 만산(晩山) 강용(姜鎔)선생이 고종 15년(1878)에 낙향해 건립한 130년 된 고택.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11칸의 긴 행랑채를 지나면 넓은 마당에 서실과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로 지어졌으며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은 정면을 피해 왼쪽으로 꺾어들도록 되어 있다.
◇만산고택 가는 길=중앙고속도로 영주 IC에서 내려 봉화방면 36번 국도를 탄다. 봉화 읍을 지나서는 현동방향 918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법전면을 통과, 계속 진행하면 춘양읍내를 지나게 된다. 만산고택은 춘양읍내가 끝날 즈음 왼편에 있다.
◇여행 팁
만산고택에 짐을 풀고 나면 인근을 나들이 삼아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다. 고택에서 영월방향 88번 도로를 따라 가면 수양도량으로서 고즈넉함이 돋보이는 고찰 '각화사'를 만날 수 있다. 태백산 자락에 자리한 각화사는 크지 않는 대신 아담하고 번잡하지 않는 대신 정갈한 사찰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특히 단청과 연화무늬의 문살이 예쁜 대웅전은 지붕 위 용마루 끝엔 여의주를 문 용이 태백산을 향해 비상하듯 향해 있어 작지만 천년고찰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범종루 옆 이낀 낀 3층 석탑과 물오른 초록 산빛, 맑은 계류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맑아지고 시원하다. 사찰 뒤편 길을 따라 1시간 여 오르면 '태백산 사고지'도 있다
각화사를 나와 오던 방향으로 계속 가다보면 봉화의 명물 중 하나인 오전약수터가 나온다.
조선 성종임금 때 부보상이 발견한 오전약수는 500여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중종 때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 하다."고 평할 만큼 물맛이 뛰어난 오전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 쏘는 맛이 일품이며 피부와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계곡 물이 흐르는 주변경관도 좋아 한 때의 휴식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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