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 즈음이다. 대구 특유의 푹푹 찌는 삼복더위가 한창이던 8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는 중이었는데, 버스 안은 그야말로 찜질방이었다.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수은주 38도를 곱씹고 있을 즈음, 버스 한쪽에 서서 책을 읽고 있는 한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읽고 있는 책에 정신없이 몰입하고 있는 모습은 유독 튈 수밖에 없었을 터. 이마와 콧잔등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목 뒤편으로는 땀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무슨 책이기에 저토록 저이의 혼을 쏙 빼놨을까? 슬쩍 훔쳐보는 내 눈은 그가 쥔 작은 책에 껌딱지처럼 들러붙고 말았다. 이성복의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
그때 나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친구들은 군대로 현장으로 떠나버려 교정은 텅 빈 듯했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도 많았다. 더욱 두려웠던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스스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이었다. 그맘때, 그 나이면 다 하는 고민들인데, 그땐 그게 그렇게 버거웠다. 그래서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같이 도서관 자료실에 틀어박혀서 도서카드의 대출 칸만 자꾸 채워가고 있었다. 그때 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이 세상에 나왔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시인이 10년 만에 발표한 '그 여름의 끝'은 이성복 시에 열광하는 마니아 독자들은 물론이고, 그의 시를 몰랐던 이들까지도 폭넓게 사로잡았다. 연애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섬세하고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시어에 홀리듯, 시집의 반향은 컸다. 특히나 나처럼 청춘의 열병을 앓는 이들에게 더더욱 그랬다. 버스 안에서 '그 여름의 끝'을 탐독하던 그 남학생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 시집을 꺼내서 읽게 된다. 20대엔 시어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찌르더니만, 서른을 넘기고 더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묵은 상처와 아련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속 깊은 시어는 세월이 지날수록 묵은 장처럼 깊은맛을 냈다. 아마도 더 나이가 들어서 이 시집을 꺼내보면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감흥이 다시 일지 않을까, 그렇게 확신을 해본다.
곧 '장난처럼' 여름이 끝날 것이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면 시인의 표현처럼 '장난처럼 나의 절망도 끝날'지도 모르겠다.
이진이(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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