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늘 푸른 송백처럼

스스로도 내가 왜 이럴까 싶을 때가 있다. 기껏 이 정도 그릇이란 말인가, 실망스럽고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함, 이성이 눌러대도 불쑥 고개를 쳐드는 질투와 시기심, 입으로는 축하한다 말하면서 마음은 도리어 쓰라리고….

언제나 당당해 보이는 법정 스님도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라고 했다. 훨씬 적게 가졌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함을 잃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가 죽는다고 했다.

20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결과를 발표하는 현장의 여러 모습들이 많은 국민들을 감동으로 물들이고 있다. 길고도 치열한 싸움 끝에 패배자가 된 박근혜 후보가 결과에 겸허히 승복하는 모습은 참 아름다워 보였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분루를 흘렸을 법도 한데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는 흔들림이 없었다. 게다가 환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승자에게 축하를 건넸다.

두 거물에 국민들의 시선이 온통 쏠려있는 탓에 남모를 설움이 많았을 텐데도 끝까지 완주한 원희룡·홍준표 후보, 그들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승자가 된 이명박 대선 후보가 자신을 지지했든 안 했든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돌리는 모습 또한 보기 좋았다.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 승자와 패자가 서로 축하하고 격려하는 모습, 확연한 열세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들이 이처럼 극적으로 어우러진 현장을 별로 본 적이 없기에 그 감동이 한층 크다.

만약 그 순간 싸늘해진 시선으로 서로가 등이라도 돌렸다면 우린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기대 이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네 사람이 그래서 고맙기만 하다.

성장기 아이들은 성장통(growing pain)을 겪으며 커나간다. 당장은 아프지만 정상적으로 몸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다. 공자도 말했다. '한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 잎이 서리를 견디고 차가운 눈과 싸워 이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늘 푸른 松柏(송백)의 굳셈은 거친 풍설을 제 온몸으로 겪은 후에야 얻게 된다. 뜨거운 풀무불을 거쳐야 불순물이 제거돼 반짝이는 精金(정금)이 있듯이. 그들의 아름다운 패배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아마도 살짝 가을내음 풍기기 시작한 저 하늘빛처럼 청량해져 있으리라.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