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위험한 것을 만지려거나 장소로 가려고 할 때 흔히 '에비!' 또는 '에비야!' 라며 제지를 한다. 어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 대변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권위와 두려움의 대상인 '아비'(父)라는 말이 '에비 혹은 어비'로 바뀌었다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어쨌든 다급한 상황에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즉각적이고도 강한 금지의 뜻을 전하는 데는 여전히 요긴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남발하거나, 특히 뻔히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큰 아이에게까지 잘못 쓸 때에는 후유증 또한 만만치가 않다. 즉 스스로가 상황을 판단하고, 제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혹은 심정적인 여유를 두지 않고서, 마구 윽박지르는 것은 자칫 굴욕감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폭력이 될 수가 있다는 얘기다. 거꾸로 사리 판단이 여의치 못한 어린 아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또한 도리어 혼란스럽게 해 불안감만 주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풍경 하나가 있다. 예전에 말썽을 부리는 어린 남매를 불러다가 혼쭐을 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어디에선가 얻어들은 '사랑의 매'라는 풍월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았다. 눈치가 빤한 큰 아이는 벌써 흐느끼면서 제 잘못을 하나하나씩 챙겨가며, 제법 앞으로의 다짐까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채 되지 않은 작은 아이는 자못 부러운 얼굴로 제 누나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더니만, 드디어 제 차례가 되자 참담한 모습으로 그만 아기 적에 똥오줌을 싼 것부터 시작해서 횡설수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발 고백할 거리라도 알려다오!"라고 절규라도 하듯이 말이다. 순간 웃음이 터져나오려 했지만, 내심으로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어긋난 만남이 빚어내는 웃지 못할 코미디는 진료실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고 있는 갓난아이에게 아예 연설집을 외고 있는 눈물겹도록 자상하신 엄마로부터, 어른 덩치만한 녀석과 마주한 의사까지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틀어막은 채 증상에서부터 진단과 처방까지 내처 일러주시는 너무나 친절한 아비까지 말이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들을 준비가 된 환자에게 거두절미한 권위주의적인 일갈이 노골적인 모욕이듯이, 말귀가 어두운 노인장에게 제멋에 취한 의사의 장황한 설명 또한 곤혹스럽기는 매한가지일 뿐이다.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또 그만큼이나 어려운 법이다. 듣는 사람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에 맞추어 말씀을 전해준다는 수기설법(隨機說法)의 방편이 부처님에게나 중생에게나 여전히 어려운 일이듯이 말이다.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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