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를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로 정의돼 있다. 다분히 부정적이다. 쓸데가 없는 말이니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의미가 상당부분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수다'의 의미가 180도 변화했다. 스트레스 해소 등 순기능이 강조되고 사람들 사이의 편안한 모든 대화를 '수다'에 포함시키면서 이젠 생활에 꼭 필요한 활력소 쯤으로 생각하게 된 것.
사실, 요즘은 수다 전성시대다. TV를 틀면 넘쳐나는 각종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 등은 모두 연예인들의 사생활과 이를 풀어내는 그들의 입담에 기댄 '수다쇼'들이다. 우리는 이런 프로그램을 보며 킬킬대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예전에는 '입이 무거워야 진짜 남자'라고 했지만 요즘은 재기 발랄하고 입담 걸출한 남성들이 외려 인기를 얻는 시대다. 지금 수다는 진화하고 있다.
▲수다로 산다
작은 중소기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한모(27)씨. 그는 알아주는 '수다쟁이'다. 잠시도 말을 쉬는 법이 없다. '침묵은 금'이라고 했건만 그에게 침묵이란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일 뿐. 올 초 회사에 입사한 그는 걸출한 입담으로 사무실 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들 컴퓨터에 얼굴을 박고 자기 일에만 급급하더라고요. 그 무거움이 싫어 아예 '푼수'가 되기로 작정을 했더니 모두들 예뻐해주시던데요. 우스개 소리로 '남자가 말이 많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그 소리 좀 들은들 어떻습니까. 웃고 떠들고 신나게 살면 그게 바로 행복한 인생 아닌가요?"
잠시도 쉬지 않는 그의 입담은 '적'도 '아군'으로 돌려놓았다. 까칠한 성격으로 사사건건 초짜인 한 씨를 괴롭히는데 여념이 없던 여자상사까지도 최근에는 아주 나긋나긋한 태도로 돌변했다고. "○○씨. 일이 많으면 나한테 넘겨요. 내가 도와줄테니까." 그는 "정말 수다가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발휘할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타고난 천성이 말이 없는 김모(28)씨는 수다가 취미라는 여자친구 덕분에 말 수가 늘어나면서 인생이 활기차진 경우다. 잠시도 대화가 끊기는 어색함을 참지 못하는 여자친구, 쉼없이 떠들어대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맞장구를 쳐주다보니 그 역시 자연스럽게 말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원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성격이다보니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상황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더군요. 수다를 떠는데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주워삼키다보니 예전보다 기분도 훨씬 좋아지는 것을 느껴요. 당장 주위 친구들이 아주 밝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스트레스 해소에 탁월한 효과
현대인들의 가장 큰 질병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스트레스. 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수다가 각광받고 있다. 남성의 25%, 여성의 43%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수다를 떤다'고 답한 것.
전문가들도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수다가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마음속에 들어찬 응어리를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 자체가 치유 효과를 낸다는 것. 미국 UCLA대학 연구팀의 조사 결과 슬픔이나 분노를 말로 표현하는 순간 스트레스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다. 말을 많이 할 경우 뇌에 있는 도파민이나 옥시토신이라고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돼 쾌감을 유발하며,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때 수다를 떨고 나면 혈압을 낮추고 혈액순환을 돕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말을 할 때 감정처리가 뇌에서 발생하는데 이때 '글로코스'라는 탄수화물이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운동효과도 높다고 한다.
수다가 이렇게 스트레스와 우울증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은 뚜렷한 목적 없이 가볍고 편안하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수다'는 정식 대화와 달리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 관념이 없다는 것. 이를 통해 수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이 상호 소통하고, 감정을 해소하고, 내면의 문제를 이끌어내 도움을 주고 받는 일종의 심리치료 역할까지 하게 된다. 특히 원인도 모른채 우울증을 앓기도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수다'만큼 명약이 없다. 속상한 이야기를 뱉어내고, 이에 대한 위로와 격려, 경험담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다고한다.
▲남자는 말수가 적어야 미덕이다?
전통적으로 '과묵함'을 미덕으로 받드는 우리의 사회 문화. 그래서인지 20대 남자의 55.3%가 수다를 즐기고 있다고 답한대 비해 40대는 10.6%만이 대화를 즐긴다고 답했다. 중'장년층일수록 '수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 '침묵은 금', '말이 많으면 쓸말이 없다' 등의 속담에서부터 '밥을 먹을 때는 말을 많이하면 안된다' 등의 밥상 교육 영향이다.
취업포털사이트 '커리어'에서 20~50대 남성을 대상으로 '남성들이 수다를 즐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48.5%가 '가볍게 보여서'라고 답했고, 23.1%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라서', 11.2%가 '시간이 없어서' 등으로 답했다. 이 역시 전통적인 교육의 영향이다. 말이 많으면 자칫 가벼운 남자, 체신없는 남자로 취급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20대 남성들의 절반 이상이 수다를 즐기고 있다는 응답처럼 최근에는 남성들도 수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남성의 사용 단어가 여성의 3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여성이 훨씬 말이 많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최근 연구결과는 이를 뒤집었다.
애리조나 대학 연구팀이 남녀 대학생 396명을 대상으로 언어습관을 조사한 결과, 남성이 하루 사용하는 평균 단어 수는 1만 5천 5백개로, 여성의 1만 6천개와 별 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
얼마 전 '토크쇼 화법'이라는 책을 낸 김일중 방송작가는 "이제는 남자들에게 '수다스럽다'는 말이 칭찬이 되는 시대"라며 "바야흐로 유머있는 남자가 주목받는 시대인 만큼 수다스럽다는 말은 '밝고 명랑하며 재기 넘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수다가 어색하다면 이렇게!
△명함에서 대화의 소재를 발견하라-그의 직장에 관한 이야기, 알만한 지인들, 그가 잘 알법한 지역 명소 등의 소재를 발굴해 낼 수 있다. 바로 명함첩에 꽂아넣지 말고 꼼꼼하게 들여다보라.
△날씨, 건강, 뉴스, 취미, 일, 가족, 음식-일상생활 속의 모든 일들은 좋은 대화 소재가 된다. 쟁점이 되는 종교, 정치 등의 이야기는 피하고 가급적 누구나 편안하게 말을 이어나갈 수 있는 소재를 택하라.
△칭찬으로 기선을 잡는 것도 기술-"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네요. 잘 어울리는데요."라든가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시네요." 등으로 느끼하지 않을 정도의 칭찬을 던지는 것도 방법이다. 다만, 너무 과한 칭찬은 오히려 상대의 기분을 망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방송, 연예, 스포츠의 소재에 민감하라-TV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은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소재다. '가벼워보일수 있다'는 두려움만 떨친다면 얼마든지 말을 이어나갈수 있는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추억은 새록새록-사람은 누구나 추억의 동물. 동시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옛날 그 때 그 음악, 그 연예인, 학교 문화 등의 소재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쉽게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