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말 좀 한다'는 사람이 필요했다. '남자들의 수다'라고는 하지만 그저 알맹이없는 수다로만 끝나서는 기사거리가 없을 것이고, 자칫 대화의 기법이라며 지면을 채웠다가는 딱딱한 사회과학 서적의 축소판이 될 판이다. 생활 속의 수다를 실천하고 있는 기자는 동네 주민(이웃집 아줌마들을 포함해서)이나 친구들, 심지어 취재원들과도 정신없이 떠드는 경우가 많은지라 그들과의 나름 흥미진진한 대화를 소재로 기사를 써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소재가 워낙 방대하고, 지면으로 옮기기에 부적절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탓에 아쉬움으로만 끝냈다. 그래서 섭외 대상으로 떠올린 2명이 바로 대구MBC 박영석 해설위원과 TBC 대구방송 황상현 기자. 박 위원은 얼마 전 보도국장을 역임한 베테랑급 언론인이고, 황 기자는 프라임뉴스 앵커를 맡았던 언론인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 '박영석의 이슈&이슈'(일요일 오전 8시20분)와 '황상현의 人터뷰'(일요일 오전 7시35분). 갑작스런 취재 요청이었지만 두 사람은 흔쾌히 응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매체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주제가 '수다'라는데 적잖은 부담을 느꼈겠지만 평소 안면을 내세운 기자의 막무가내 요청에 '일단 나간다'는 답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다가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명색이 지역 방송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행여 '수다스럽다'는 평가를 듣는 것은 곤란하다는 박 위원의 지적이 나왔다. 결국 수다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이 자리에서 수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됐다. "수다는 쓸데없이 말이 많은 것을 뜻한다."는 기자의 말에 박 위원은 "그것 봐라.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쓸데없이 말만 많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자칫 인터뷰가 무산될 위기에 봉착한 기자는 말을 바꿨다. "수다라는 말이 부담스러우면 '대화'로 바꾸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지역에서 토론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두 전문가에게 대화의 기법과 중요성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한 자리다." 본격적인 수다가 이뤄지기 전에 거의 20분간 수다와 대화의 차이, 수다가 갖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설득이 이어졌다. 자칫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는 기자의 설득에 두 사람은 긴가민가하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면서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이야기나 해보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다를 시작했다.
박 위원은 대화, 즉 말의 필요성에 대해 운을 뗐다. "흔히 남자들은 말이 많으면 안된다. 또는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고 말하는데 틀린 말이다. 물론 불필요하게 말이 많으면 가볍게 보일 수도 있고 신뢰를 주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과묵함에 대해서 지나치게 칭찬 일색이고, 특히 대구경북 사람들은 남자들의 달변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밥상머리에서 말을 하지 마라, 남자가 뭐 그렇게 말이 많으냐는 식의 교육을 받다보니 어느 순간 '말 많네.'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갖게 됐다."
황 기자는 한나라당 대선 경선 대구경북합동토론회 취재를 다녀왔다고 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도무지 유머 감각이 없다. 토론회에서도 주어진 12분간 자신의 주장만을 미어터지도록 외친다. 그래서는 설득력이 없다.
아울러 남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여성들은 쇼핑, 액세서리, 연예인, 유행, 친구 등등 무한정한 소재거리를 갖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비해 남성들은 고작 정치, 경제, 축구 이야기뿐이라는 것. 박 위원은 "그것 역시 교육의 효과다. 자기 이야기를 떠들면 가볍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고, 처신을 잘못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십상이다. 특히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은 침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지나친 경쟁이 가져온 폐해일 수도 있다. 행여 남에게 흠 잡힐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다의 순기능 중 하나는 스트레스 해소다.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서 후련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아울러 스트레스는 대인관계에서 비롯한다. 특히 직장 상사는 수다거리 중 으뜸이다. 흔히 말하는 '씹는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두 사람은 공감하지 않았다. 황 기자는 "성공하는 사람들은 남을 욕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남 얘기해서 좋을 것 없다. 결국 객관적인 내용도 없이 사람 한 명 도마 위에 올려놓고 술 안주거리 삼는 것이 바로 '씹는다'는 것 아닌가? 대구라는 지역 사회가 좁아서, 나중에 그 말이 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남 욕하기를 피하라는 뜻이 아니다.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 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 기자는 여기에 반박했다. "사실 수다는 편하게 대화하는데 의미가 있다. 이 말 빼고, 저 말 빼면 할 말이 없다. 특히 스트레스 대상을 거침없이 욕하고 나면 후련함을 느끼지 않는가?" 이쯤에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는 수 없이 딱딱한 질문 하나. 토론 문화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오랜 기간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설득력있는 의견을 내놔도 수긍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자신이 그 의견을 받아들이면 패배한 것처럼 여긴다. 물론 특정 단체를 대변하는 자리여서 어렵기는 하겠지만 부분 부분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박 위원의 말에 황 기자는 색다른 주장을 폈다. "토론 프로그램은 21세기의 콜로세움, 즉 격투기장이라고 본다. 얼마 전 영화 '디워'를 다룬 토론 프로그램에서 진중권 씨는 TV에서 쉽게 보기 힘들만큼 맹공을 퍼부었다. 토론 자체가 한정된 공간에서 칼과 방패를 갖고 싸우는 다툼이다. 시청자들은 그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폭력성이 언어로 발전한 것이 오늘날의 토론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아무리 농담처럼 수다를 떨려고 해도 토론이라는 틀은 깨기 힘들었다.
특히 박 위원은 수다라는 주제를 부담스러워했다. 기자는 "딱히 어떤 주제를 갖고 논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처럼 격의없이 편하게 나누는 대화를 수다라고 정의하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각 방송사의 메인 토론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수다스럽다는 말이 안나오도록 유념하겠다는 약속도 한번 더 보탰다. 기자의 생리는 기자가 가장 잘 안다고 했던가? 황 기자는 "그렇게 말해놓고 보나마나 생각나는대로 쓸 가능성이 높다. 어찌됐던 잘 써달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평소 인터뷰가 끝나면 한 명도 예외없이 기자에게 던지는 말이 바로 그 말 아닌가. 아무리 농담이 오가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 박 위원은 별명이 '품위 박'이라고 털어놨다.
"얼마 전 교육발전협의회 위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더니 시교육청에서 올해 사업으로 친절교육을 하겠다고 밝혔다. 불친절하다는 대구 이미지를 벗기 위해 학생들에게 이런 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구 시민이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표현에 서툴러서 퉁명스럽게 보일 뿐이다. 경상도 남자가 집에 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아는?(아이는?), 밥도, 자자!", 이 세 마디뿐이라는 우스개도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공손함만 보고 친절하다고 할 수 없다. 자기를 드러내는 표현교육이 필요하다."
박 위원은 수다 또는 대화를 정의할 때 몸짓, 손짓을 이용한 거침없는 자기 표현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왕에 '남자들의 수다'라는 주제를 정했다면 얼마나 솔직하고 자신있게 스스로를 표현하는가를 다뤄야 한다는 것. 아울러 대화를 즐길 줄 알고, 즐겁고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수다에 대한 부담감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하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수다의 기본이다
두 사람 모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즐거운 대화 상대가 필요하며 스스로 이런 사람이 되려면 '배려'라는 기본 정신이 필요하다고 공감했다. 황 기자는 "일전에 조회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1분을 말하고, 2분을 듣고, 3분을 맞장구쳐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그만큼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면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전부 1분 말한 뒤에 5분 동안 듣거나 맞장구만 치면 대화가 이어질 수가 없다."고 했다.
박 위원은 토론 출연자 중에 기본적인 답변량이 절대 부족한 사람과 부자연스런 서울 말씨를 쓰는 사람이 가장 부담스럽다고 했다. "최소한 1~3분 가량 답을 해야 진행이 원만한데 10초도 채 답을 하지 않고 끝내버린다.
이런 경우엔 답답해질 수 밖에 없다. 아울러 평소에 말을 잘하던 사람이 카메라에 불만 들어오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서울 말투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든다. 채널 돌아가는 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아서 진땀이 날 정도다." 와인 두 병을 비우고 나서 좀 더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근처 맥주집에서 벌어진 2차 수다 아니 토론은 훨씬 뜨거웠다. 토론 프로그램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어달라는 신문기자들의 애정어린 당부에 방송기자 두 명은 언제 연합세력을 구축했는지 "제작 환경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이라며 손사레를 쳤다. 자연스레 알코올 섭취량이 늘어갔고, 앞서 짐짓 토론 분위기를 고수하던 박 위원도 수다 분위기에 편승했다. 물론 두 사람은 결코 수다스럽지 않았다. 다만 대화를 즐기고, 말과 말이 오가는 유희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대화 소재는 태평양을 떠다녔지만 수다의 유쾌함은 결코 표류하지 않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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