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쯤 한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박노자 교수가 우리나라 시를 낭송하는 장면을 우연히 본 일이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로 시작하는 그 시는 러시아 사람인 박노자 교수의 이국적인 발음과 더해져 가슴이 울릴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시인 백석의 '북방에서'라는 작품이었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학교에선 제목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시였다. 월북작가인 백석의 시가 80년대 후반에 와서야 해금됐지만 대중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박노자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여태까지 이런 시인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문학의 한 부분을 국가가 잘라낸 것"이라며 백석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교과서에 월북 작가의 작품이 별로 실려 있지 않은 것은 정치적 배경이 작용한 탓이 크다. 월북 작가라는 굴레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태준(1904~?) 역시 백석 못지 않게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순수문학동인인 구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던 그는 1946년 홍명희와 함께 월북,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한동안 사라졌다.
새로 나온 책 '돌다리(이태준 글/열림원 펴냄)'에서는 이태준의 단편소설을 모았다. 1930~40년대에 쓰여진 작품들이다보니 단어 해설과 각주를 참고해야 할 정도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힘과 주제의식은 김동인, 현진건을 잇는 근대 단편소설의 대가라는 평가에 무게를 실어준다.
표제작으로 나온 '돌다리'는 땅을 팔아서 병원을 확장하려는 아들과 땅을 하늘처럼 여기며 소중히 하는 아버지의 갈등을 통해 물질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을 비판한 작품이다. 아버지가 면에서 놓아준 나무다리를 마다하고 돌다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돌다리가 후손에게 물려주고픈 옛것이자 전통적 가치관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다리는 땅에 대한 애정으로 그대로 전환된다.
'땅이란 천지 만물의 근거야. 돈 있다구 땅이 뭔지도 모르구 욕심만 내 문서 쪽으로 사 모기만 하는 사람들, 돈벌이처럼 변리만 생각허구 제 조상들과 그 땅과 어떤 인연이란 건 도시 생각지 않구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 다 내눈엔 괴이한 사람들루 밖엔 뵈지 않드라.(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중)'
이외에도 근대 자본주의의 배금주의를 고발한 '복덕방', 호흡이 짧고 유미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달밤'도 눈길이 간다. 논술 대비용으로 출간했다는 책이라 문답식 해설코너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작품 속 주제의식만큼은 진지하게 다가온다.
▶'돌다리'에서 아들은 땅을 금전적인 가치의 대상으로 보는데 이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땅은 이익의 대상이며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좋은 것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아들의 생각을 아버지의 관점에서 비판해보자.
▶'복덕방'에서 안 초시는 일확천금을 바라고 부동산 투자를 했다 사기를 당하고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자살 뒤엔 사회에서 소외된 패배감과 이기적인 딸로부터 받은 홀대가 숨어 있다. 안 초시가 부동산 투자를 한 이유와 죽음의 동기를 생각해보자.
▶작가 이태준이 김동인, 현진건을 잇는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김동인의 '감자', 현진건의 '고향' 등의 작품과 이태준의 작품 속에서 공통되는 주제의식을 일제강점하의 시대상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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