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순정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청마 유치환이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써보낼 때 그 언저리 어디쯤 있었을 그런 우체통을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범람으로 공중전화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영화 '팔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사진관 같은 작은 동네 사진관들도 디지털 카메라에 밀려나고 있다. 간이역마다 서던 협궤열차가 사라진 곳엔 관광객을 태운 레일바이크들이 오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 중에도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가고 있다. '純情(순정)'도 그 중 하나가 아닐는지…. '순정'! 그나마 이 낱말을 간간이 찾아볼 수 있는 데라곤 '순정만화처럼~' 이 고작이다. 하긴 만화라는 게 현실과 거리가 있는 것이니 그 앞의 '순정'이란 단어도 현실에서 워낙 보기 드문 탓에 붙여지는 것 같다.

대학시절 신입생 환영파티에서 만난 북한 유학생과 4년여 열애에 빠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동독 출신의 레나테 홍 할머니.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짧았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북한의 유학생 소환 조치로 결혼 2년 만에 남편과 생이별해야 했다. 남겨진 것이라곤 두 어린 아들과 남편을 향한 그리움뿐.

홍 할머니가 며칠 전 한국에 왔다. 함흥에 살고 있다는 남편을 단 한번이라도 만나 지난 세월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금강산에도 다녀왔다. 46년 동안 두 아들을 홀로 키워온 할머니의 순정이 놀랍다. 우리네 속물근성이 부끄럽기만 하다.

부부의 3단계 진화라는 우스개가 있다. 1단계는 신혼 초로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사생사사'다. 지하셋방에 살아도 행복하고. 삼층밥도 예술로 보인다. 2단계는 결혼 5년차 이상으로 돈에 살고 돈에 죽는 '돈생돈사'. 돈만 많이 벌어주면 만사 오케이다. 3단계는 결혼 15년차 이상으로 정에 살고 정에 죽는 '정생정사'다. '그놈의 정' 때문에 그럭저럭 산다는 거다.

고정희 시인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 노래했다. 그렇다면 '순정'이 사라진 뒤 남는 것은 무얼까. 레나테 홍 할머니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아름다운 가치 '순정'을 위해서라도.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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