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부 수술의 종류 중에 '개복 후 폐복'이란 것이 있다. 수술을 할까 하고 배를 열었다가 수술이 불가능하다거나, 또는 수술로 이점이 없겠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바로 닫아버리는 것이다. 말이야 간단하지만 '수술을 안 한다'는 것은 집도의사로서는 매우 외롭고 힘든 결정이다. 더구나 그런 사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일 환자와 보호자를 생각하면 차마 내용을 전하기가 싫어진다.
흔히 과거에는 암이라고 하면 주변의 가족과 친지들은 환자에게 무조건 병명을 숨기는 것이 관례였다. 혹시라도 환자가 의료진을 통해 병명을 알게 되면 보호자들이 거세게 항의를 하곤 했다. 그래서 내게는 자연히 굳어진 오랜 습관이 있는데 환자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 한 절대 '암'이란 단어를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 '암' 대신에 '병', '항암제' 대신에 '약', '전이' 대신에 '주변에 옮긴' 등등의 용어를 쓴다. 이처럼 암이란 병명만 해도 국가기밀보다 더 비밀스러운 것이었기에 '개복 후 폐복'을 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0년쯤 전이었는데 환자는 졸업을 몇 개월 앞둔 23세 여대생이었고 병명은 위암이었다. 소녀가장으로 시작하여 고학으로 대학 졸업을 앞둔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스타일이었고, 본인이 가장이다 보니 이미 병명도 알고 있었다. 나는 레지던트로 수술 보조의사 역할이었는데 개복을 해보니 이미 암이 복막에 모두 퍼져 있었고 바로 폐복을 했다. 나중에 병실에 가보니 그 환자는 이미 마취에서 깨어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는 수술이 잘 됐다고 이야기했는데 환자는 피식 웃더니 "제가 내년 2월이 졸업인데, 졸업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내심 무척 놀랐으나 짐짓 태연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숨기지 마세요. 마취 직전에 수술실 시계를 봐 두었고, 마취에서 깨 다시 시계를 봤어요. 수술 시간이 너무 짧은데 그냥 닫았죠?"라고 했다. 레지던트 시절에 잠시 맡았던 환자라 과연 그 여대생이 졸업을 하였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렇듯 기억에 남을 정도로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보호자들이 나서서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이 근래에 와서는 많이 바뀌고 있다. 나는 아직도 암이란 단어를 먼저 꺼내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환자 본인이 "몇 기입니까?", "전이는 있나요?"라고 묻는다. 심지어는 "암도 수술만 하면 낫지요?"라고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물어 더 당황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물론 수술 방법과 수술 성적도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했고,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 등의 수술 이외의 방법들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한 암을 이젠 일찍 발견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아주 심한 경우에도 '난치의 병'일지는 몰라도, 또는 나을 수는 없더라도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꾸준히 '치료는 가능한 병'이라는 것을 환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최근에도 수술 중에 보호자를 만나서 '수술을 강행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라는 말을 어렵게 전하고 동의를 얻어 폐복을 했다. 나중에 무거운 마음으로 병실에 가보니 환자가 오히려 담담하게 미소를 띠고 "모두 전해 들었습니다. 다음 단계의 치료계획을 상의해야지요?"라고 한다. 의사가 오히려 뒤처지는 느낌이고 이미 환자는 저만치 앞서 달린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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