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처가 예술을 만든다] ⑭한국화가 김호득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길. 거기에는 수많은 비의 점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화실 앞에 도착했을 때 희한하게 비가 말갛게 그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으면서 창밖 교교히 뜬 달을 본다는 것은 기이한 경험이었다.

한국화가 김호득(57·영남대 교수). 깡마른 몸에 하얗게 센 머리카락. 그를 처음 본 순간도 기이한 느낌이었다. 동적인 흐름과 정적인 이미지가 마치 쏟아지는 비 속에 뜬 달 같았다.

그는 한국화단의 이단아다. 고답적인 한국화에 추상의 이미지를 넣고, 설치미술의 개념까지 도입했다. 한 개의 점으로 압축하거나, 혹은 수십만 개 점으로 확장하는 등 그의 캔버스는 너무나 자유분방해 프레임을 초월한 듯하다.

그는 고독한 아웃사이더이며, 가시덤불을 헤쳐나간 한국화의 프론티어이다.

1950년 8월 전쟁통 한가운데, 그것도 길 위에서 태어났다. 만삭인 어머니가 대구에서 칠곡군 인동의 친정으로 출산하러 갈 때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었다. 피가 강물을 적시던 그 길 위 어디에서 그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때 토지개량조합의 조합장까지 했다. 살림도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술이 문제였다. 집도 자주 비웠다. "아버지 술 때문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지." 폐병이 들어 집에 와서 각혈도 했다. 아버지의 방황은 온 가족의 고통이었다. "그때 쇼크를 많이 받았어."

대구에서 중2(경북중)까지 다녔으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집안형편도 곤두박질쳐 바닥일 때다. 그는 커서도 절대 술을 안 마시려고 했다. 그러나 술은 내력이다. 그는 술로 고독을 풀고, 술로 고통을 잠재웠다. 결국 술에 빠졌다. 1996년에는 극단까지 치달아 죽음 직전까지 갔다.

한때 그는 그림 그리는 주선(酒仙)으로 통했다. 흰 광목천에 미친 듯 쏟아내리는 폭포의 물줄기도 술이 그려낸 몰아의 경지로 이해됐다. 그러나 그는 "그건 술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술의 힘은 아이디어를 줄 뿐 작품의 완성도까지 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평단에서 호평을 받은 폭포와 계곡 그림은 1997년 학고재 전시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들이다. "그땐 술을 끊었을 때지. 맑은 마음으로 과거를 반추하며 맨 정신으로 그린 그림들입니다."일필휘지(一筆揮之) 거침없고 격정적인 작품세계와 달리 영혼은 늘 고독했다. 술에 빠진 것도 감성적이고, 연약한 심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느 시인은 겨울 바닷가 수족관의 도다리를 보고도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 그도 늘 상처를 입는다. 화폭에 점 하나 잘못 찍혀도 가슴에 못이 찍힌 것 같이 아프다. 그의 상처는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 무기징역을 받은 좌익 삼촌의 연좌제 같은 것이 아니다. 남들과 같은 상처면 이미 내 상처는 아니다는 식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 그리고 예술을 한다는 것, 그리고 늘 죽음을 염두에 두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가 아닐까. "난 극단으로 몰고 가. 고통에 나를 맡겨. 거기서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 수법이야." 그는 한 번도 현실에 안주해 보지 않았다. 산수화가 대세인 한국화에 터진 나무의 껍질 같은 붓 터치로 "이게 한국화야!"라고 대들었다.

쉽게 벌던 미술 레슨 벌이를 내팽개치고 아내에게 하루 2천 원 용돈을 받아 소주 한 병, 담배 한 갑 사들고 화실에 틀어박혔다. "정말 막막하고 대책 없고, 고통스러웠지." 그러나 극단에서 그는 자신을 찾았다. "위험수위가 오면 냄새를 맡아. 이건 아니구나.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으면 냄새를 맡아야지."

20년 넘게 폭음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1996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폐렴까지 왔다. 의사는 죽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다시 섰다. 그는 "한국화의 정수는 동양의 기"라고 했다. "이건 서양애들은 도저히 모를 일이지." 서양화는 물질이 확인 안되면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그들과 "타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지난 2004년 개인전 타이틀이 '흔들림, 문득.-사이'다. 수만 개의 점으로 채워진 작품들이 전시됐다. 하나의 점은 세 번의 붓 터치로 이뤄진다. 수만 개의 점에는 수십만 개의 기가 찍힌 것이다. 그는 "기를 한 단위 한 단위로 방출한 것이며, 이 또한 전체로 보면 하나다."고 했다. 그는 점을 찍을 때마다 철철 흐르는 기의 흐름을 느낀다.

흔들리는 속(俗)에서 문득 기(氣)의 방출을 깨닫고, 다시 원점에 돌아온 그의 인생과 삶이다.

그것은 길 같은 것이다. 그의 길은 늘 끊임없는 용솟음 한가운데 있었다. 유화와 민중미술, 설치미술을 휘돌아 다시 한국화로 오고, 그 한국화마저 반추상에 파격을 거듭했다. 5~6년 주기로 반복되는 탈태(奪胎). 그는 좀체 몸을 편하게 두지 않는다.

지금도 그는 그 길위에서 또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제 또 한번 바꿔야 될 것 같아. 슬슬 재미없어지거든." 매너리즘의 거북스러움이 스멀스멀 기어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살아온 궤적도 그렇지만, 그의 예술은 늘 상처난 나그네처럼 길 위를 떠나지 않고 있다. 길위에서 태어난 그의 태생처럼 말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1950년 대구 출생. 1975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85년 동대학원 동양학과 졸업. 1996년 관훈갤러리를 시작으로 20여 회 개인전. 1996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90년대 한국미술로부터', 2003년 베이징국제비엔날레 한국미술 특별전 등 100여 회 초대전. 1993년 제4회 김수근문화상 미술상, 2004년 제15회 이중섭미술상 등 수상. 현재 영남대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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