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가을비

지난여름은 유난스러웠다. 무더위도 그랬지만 장마 끝난 후에도 8월 한 달을 줄곧 비로 지새웠다. 도깨비 같은 호우에 일기예보는 일쑤 빗나갔다. 우리 모두는 마치 영국인처럼 햇볕 쨍쨍한 날에도 우산을 챙겨들고 다녔다. 2007년 여름은 그야말로 비, 비, 비, 비. 비…로 기억될 것 같다.

가을 초입에 들어섰는데도 여전히 비가 오락가락한다. 며칠 사이 여름비에서 가을비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통상 가을비는 강우량이 적고 빗발 또한 가늘고 성글다. '가을비는 장인 구레나룻 밑에서도 피한다'는 옛속담이 있을 만큼. 그러고 보면 일 년 사계절의 비는 우리 인생을 닮았다. 새싹을 틔워내는 봄비는 소년기의 귀여움과 순수함을 닮았고, 번개와 천둥을 이끌고 오며 한바탕 요란 떠는 여름비는 성급하고 뜨겁고 실수 많은 청년기의 열정을 닮았다. 가을비는 중·장년기를 빼닮았다.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오느라 세찼던 기세가 한풀 잦아든, 그래서 한결 여유롭고 푸근해진 모습 같은….

조선조 진주 명기 勝二喬(승이교)의 시에는 여름과 가을이 겹쳐진 무렵의 비 내리는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려져 있다. '~연당에는 가을비가 후두둑 오고 / 이슬 맺힌 가지에선 매미소리 목메이네~(蓮堂秋雨疏/ 露枝寒蟬咽).

그러나 실상 초가을비는 알곡과 과실을 여물게 하고 익히는 데는 방해꾼과도 같다. 그러기에 진짜 가을비다운 비는 늦가을의 그것 아닐까. 어딘가 쓸쓸한 듯하면서도 高雅(고아)한 멋을 풍겨내는 그런 비 말이다.

무엇보다 가을비의 미덕은 '그리움'을 자아내는 데 있지 않을는지. 어쩔 수 없이 강퍅해진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 드리워지는 두레박 하나! 唐(당) 시인 李商隱(이상은)의 '밤비 속에 북쪽으로 부치는 편지(夜雨寄北)'는 가을비가 돋워내는 그리움의 정서를 노래한다. '당신은 언제 돌아오냐고 물었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오/ 파산의 밤비, 가을 연못이 불어나오/ 어느 때에나 함께 서창의 촛불을 돋우고/ 그러고서는 파산의 밤비 이야기를 할는지(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燭/ 却話巴山夜雨時)'

어느덧 8일은 白露(백로). 만곡이 무르익는 완연한 가을임을 말해주는 절기다. 지구 온난화로 아직 이슬 맺힐 때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이젠 한 차례 비 올 때마다 가을이 쑥쑥 깊어간다는 거다.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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