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 한잔의 단상]큰어머니, 내 큰어머니

수성시장 안쪽의 2층 양옥집입니다. 비가 오면 지하실에 물이 새어들어 쌓아 둔 연탄을 뭉개곤 했습니다. 비 오는 낌새만 보여도 바짝 긴장하신 큰어머니는 바가지를 준비합니다. 물 퍼내는 당번은 정해져 있습니다. 큰어머니와 나, 빗물이 마당에서 대문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신호로 약속이나 한 듯 지하실로 향합니다. "덕분에 지하실 청소 깨끗하게 하네."

딸랑딸랑~, 맑고 영롱한 요롱소리가 여명을 뚫고 새벽을 깨웁니다. 청소차! 뒤척일 틈이 없습니다.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연탄재 가득 쌓인 마대자루를 들쳐 메고는 신들린 듯 달려갑니다. 기습작전 하듯 순식간에 꼬리를 감추는 꼴이 벌써 만차가 된 모양입니다. 헐레벌떡 쫓아가 자루를 냅다 던집니다. 뽀얗게 재 뒤집어쓴 청소부아저씨의 멋진 순발력, 매 병아리 낚아채듯 받아서 영~차, 높이 쌓인 잿더미위로 포갭니다. "우리 정태 없으면 연탄도 못 때겠네."

연탄 한 장도 귀하던 시절입니다. 식구들이 출근하고 나면 큰어머니는 연탄아궁이를 꽁꽁 틀어막습니다. 하루 세 번 갈아야하는 연탄불을 아끼려는 것입니다. 어쩌다 아궁이 막는 것을 잊어버린 날에는 후회막급 넋두리를 가슴 저리도록 하시곤 했습니다.

야간자습을 마치고 귀가하면 밤 11시가 넘습니다. 녹초가 되어 엎어지면 방바닥은 늘 따끈하게 데워져 있습니다. 허술하게 지어진 2층 양옥집의 북쪽 방은 온종일 햇볕이 들지 않습니다. 하루 세 번 연탄을 갈아야 하는 연탄보일러로는 아무리 지져도 따뜻해지기 힘든 방입니다.

학교 개교기념일이라고 오전 수업만 하고 귀가한 날이었습니다.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습니다. 대문을 열고 집안을 기웃거리다가 뒷간 연탄아궁이 근처에서 큰어머니를 발견합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깜작 놀란 큰어머니, "왜 이렇게 일찍 왔니?" "뭐 하세요" "응, 연탄구멍에 물 붓고 있다. 얼마나 빨리 타버리는지"

제 살을 태워 연명하는 연탄은 아궁이를 틀어막아도 하루 버티기 힘듭니다. 번개탄도 없던 시절, 불씨 꺼지면 다시 지피기도 어렵습니다. "아무리 조절해도 저녁때 연탄불을 갈게 되네." 하얀 연탄 까만 연탄을 이리저리 뒤바꾸시던 큰어머니, 매번 귀가시간에 연탄을 갈게 된다고 푸념하십니다. 그리곤 새로 간 연탄 열 내는 것 기다리다 조카 얼어 죽이겠다고 온 집안 아궁이를 헤집어 알불연탄을 찾으십니다.

지난 주 벌초를 했습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더미에서 큰어머니를 찾아내었습니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죄스러움에 애꿎은 하늘을 쏘아 봅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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