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류인서 作 '거울'

거울

류인서

시골집 수돗가 빛 바랜 저 거울에게도 어느 순간 반짝, 빛나던 때가 있었다

일생을 흘려보낼 조그마한 저수지를 이루었다고 세숫대야 물이 흰 부추꽃처럼 찰랑일 때

아버지 돋보기 안경에 날아 앉은 잠자리가 멀리 있는 어린 자식 안부 편지를 읽을 때

긴 여름날 마당가 백일홍 꽃 속에서 더위 한 자락 싹둑 자르는 가위 소리 들릴 때

오래 집 나갔던 맨 끄트머리 보랏빛 형제가 돌아와 일곱 색깔 모두 모였으니 어머 이리 나와봐, 저기 무지개 떴어

포도 몇 송이 놓고 식구들이 빙 둘러 앉을 때, 으깨고 으깬 그 저녁의 육즙

그리고 시골집 수돗가 거울이 마지막 반짝 빛나던 때, 이삿짐 나가고 식구들 다 떠나고 담장 밖 능소화가 적막한 등불 하나 걸 때

아침이 되면 보랏빛 트럼펫 소리가 우리 잠을 깨웠다. 수돗가에 매달아 놓은 나팔꽃 줄기. 나팔꽃이 자욱하게 핀 수돗가에서 턱수염이 막 나오기 시작한 형들은 엇둘 엇둘 아령과 역기를 들고, 간밤 이마에 돋은 여드름을 감춘 채 누나들은 조심스레 세숫대야에 손을 담갔다. 무지개가 흔하던 시절이어서인지 웬만한 집마다 대개 칠남매. 빨강에서 보라까지 일곱 남매들은 갖가지 사연도 많았다.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지만 그 부대낌 속에서 인정은 도탑게 살을 찌웠으니, 그 은성(殷盛)했던 시절이여. 이제 형제들 흩어지고 부모님 연로하시니 인기척 사라진 시골집에는 괴괴한 두루 적막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으리라. 잡초 우거진 수돗가 모퉁이 빛 바랜 거울이 퀭한 눈동자로 걸려 있으리라.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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