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한국영화 걸작 10편을 꼽는다면 반드시 들어갈 작품이다. 이 영화는 스타일리쉬한 화면, 과잉된 감정의 폭발, 절제된 조화로 관객들을 이입시킨다. 그 이입의 이유에는 이우진과 수아, 오대수와 딸 미도 간의 사건도 한몫을 한다. 그 사건은 바로 그들이 근친상간을 저지른다는 것. 물론 차이는 있다. 이우진과 수아는 둘이 남매임을 알면서도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영혼을 사랑했다. 대수와 미도는 좀 다르다. 오대수는 이우진이 짜놓은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그녀가 딸인 지 모른 채 동침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오대수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인격 중 하나를 몬스터라고 호명하면서 그것을 최면으로 지워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가능해진다. 오대수가 지운 기억은 무엇일까? 두 가지가 대답이 마련될 수 있다. 하나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딸과 재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미도와 함께 밤을 지샜다는 사실을 지우면 된다. 다른 선택도 있다. 미도를 연인으로 택하는 것이다. 미도가 자신의 딸임을 알았던 순간들을 기억에서 지워내면 미도는 딸이 아니라 연인이 된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물어보자. 오대수는 미도를 딸로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연인으로 선택한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그 어떤 기억을 지운다 할 지언정 미도가 생물학적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억이 대뇌피질에서 사라질 뿐이지 그들의 혈액 속에 흐르는 DNA 유전자 형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대수는 혀를 잘라 내 언어를 봉인한다. 언어를 봉인한 채로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이쯤되면 박찬욱 감독의 선언이 흥미롭다 못해 짜릿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금하는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조항은 어쩌면 "기억"의 수준에 달려있을 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이다.

만일 이 오래된 금기가 기억에 불과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근친상간을 가장 위험한 행위로 금지하면서도 여러 가지 문화적 아이템으로 바꿔 즐기고 있다. 이를테면 '가을동화'류의 드라마도 그렇다. 친남매 지간으로 알고 자라난 두 남녀가 실은 남남인 것을 알고 그 감정을 이성애로 키워 나간다. 다른 이야기로 전환될 수도 있다. 연인으로 만나 사랑했는데 알고 보니 어린 시절 헤어진 남매였다.

실상 살아오면서 근친상간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면 그 욕망자체를 무의식에 가둬두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일상에서 그런 감정은 출몰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작품들은 이 욕망을 여러 번, 거듭, 심각하게 다룬다. 장예모 감독의 '황후화'에서도, 풍소강 감독의 '야연'에서도, 영화 '페드라' 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관계들은 꼭 생물학적 근친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런 작품들은 "가족"이라는 체제 자체가 어쩌면 금지와 강제라는 규율 위에 세워진 욕망의 억압기구라는 제안을 내포하고 있다.

왜 금기일까? 오래된 금기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을까? 영화들은 이 오래묵은 질문을 또 다시 자극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