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때 관리 등용 기준은 身言書判(신언서판)이었다. 豊偉(풍위'身)와 辯正(변정'言), 遵美(준미'書), 文理(문리)의 優長(우장'判)으로 인물을 평가했다는 게 사전 풀이다. 1천 년이 훨씬 지나서도 이 기준은 유효한데 오늘날 가장 비중 높은 덕목으로 꼽히는 것이 判(판)이다. 이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보편적 진리에 접근하는 판단력을 의미한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판단력은 좁은 울타리 속에서가 아니라 어디에도 막히지 않고 두루 통할 경우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다. 사물의 한 면만 보고 전체를 파악하기가 힘든 것은 판단력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학계에서는 몇 년전부터 統攝(통섭)이라는 개념을 주목하고 있다. 통섭은 사회생물학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이 1998년 '컨실리언스(Consilience):지식의 통합'이라는 책에서 처음 제시한 것으로 컨실리언스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윌슨은 '진리는 각 학문분야를 모두 통섭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서구 학계는 물론 우리 식자층 간에도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진리에 접근하려는 열린 사고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접목한 강의로 유명한 한 중진교수가 인문과 자연과학을 아우른 새 강좌를 개설하겠다고 대학 측에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는 너도나도 학문융합을 떠들고 있지만 대학도 교수도 정작 이를 기피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생각과 사고의 절름발이를 만드는 이 같은 풍조가 어디 학교뿐일까.
식자들이 통섭을 일방향성의 환원적 통합으로 해석하든 상호적 통합으로 이해하든 상관없다. 가치를 가치로 받아들이는 자세, 사람이든 자연이든 문화든 다른 것을 인정하고 전체에서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학문 논쟁이 변질돼 사생결단의 편가름으로 끝나고 만 조선시대 당쟁도 그 근원은 상대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있었다. 지금의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一物含天地 人將一物來 若能知一物 天地幻中開'(한 물건 천지를 담았고 인간은 어찌 한 물건 지녔네. 한 물건을 능히 안다면 헛것 중에 천지가 열리네). 육조 혜능의 게송도 이를 경계한 것은 아닐까.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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