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하회탈춤

서양의 가면무도회는 익명성으로 출발한다. 달랑 가면 하나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감추거나 전혀 알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서로서로 '나는 너를 모른다'는 전제를 인정한다. 함께 춤을 추는 이 사람이 구두 수선공이거나 빵집 아저씨, 채소가게 주인이든 돈 많고 교양 있는 귀족이든 알 필요가 없다. 사람과 사람, 남자와 여자로 충분하다. 난처한 돌발상황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충분하듯 가면이 일상의 관계를 무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면무도회는 욕정을 참지 못한 바람둥이를 연상케 한다. 항해를 떠난 남편의 부재를 이용한 유부녀의 바람기가 베니스의 가면무도회를 유명케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가면무도회는 바람둥이만의 축제가 아니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도 가면의 무대에서는 당당할 수가 있었고 교양의 굴레를 벗어난 귀족에게도 가면놀이는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가면무도회의 출발은 평등이다. 신분과 부귀의 현실이란 잣대를 벗어 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가면이 주선한 것이다.

내일부터 안동에서는 세계탈춤페스티벌이 열린다. 국내외 20여 개 놀이패가 참가한다. 하회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빈 하회별신굿놀이(하회탈춤)판을 세계적 춤판으로 키운 축제다. 하회탈춤의 출발도 평등에서 비롯된다. 양반이든 상놈이든 마을의 같은 구성원임을 인정한다. 반상의 구별이 엄연한 시절 상놈이 양반을 마음껏 조롱하는 놀이판을 벌일 수 있었던 건 바로 평등의 정신때문이었다.

범 같은 양반들도 별신굿 때만큼은 너그러웠고 양반집 대청마루도 이날은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었다. 양반과 선비의 무지와 위선을 놀려대고 걸쭉한 음담이 난무해도 아무도 치도곤을 당하지 않았다. 하회탈춤을 양반과 상민의 절묘한 타협이 이뤄낸 축제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의 차별과 질서를 벗어나 양반을 조롱하고 감춰진 성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다 보니 당연히 웃음이 나온다. 놀이의 최고 가치인 재미가 하회탈춤에는 듬뿍 담겨 있다.

서양의 가면이나 하회의 탈은 모두 허구와 실제를 혼동하게 한다. 하늘이 바다인지 바다가 하늘인지 알 수 없다는 노랫말처럼 어쩌면 가면 속의 현실이 바로 가면인지도 모를 일이다. 관계와 자리매김이 가면을 어쩔 수 없게 했다면 함께 탈을 쓰고 덩실덩실 춤추며 감춰진 마음을 드러냄도 유쾌한 일이 아닐까.

서영관 북부본부장 seo123@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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