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생의 땅 가야산] (13)단지봉~남산제일봉 능선길

우리 선조들은 산 봉우리에 이름을 붙이는 데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떡을 찌는 시루와 닮았다고 해서 시루봉, 스님들이 쓰는 대접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바래봉, 장군들이 쓰는 투구가 떠오른다 해서 투구봉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물건에 연유해 그 이름을 지어줬다. 억지 춘향식으로 잔뜩 꾸미기보단 마음 가는 대로 살았던 선조들의 올곧은 심성을 산 봉우리 이름에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가야산에도 그 모양새에 따라 이름이 붙은 봉우리가 있다. 수차례 얘기한 것처럼 우두봉(牛頭峰)은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고, 두리봉은 그 형상이 두루뭉실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는 것이다(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해서 두리봉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음). 또 단지봉은 봉우리의 형상이 단지를 엎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

높이 1028.6m인 가야산 단지봉.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에서 남서쪽으로 약 6㎞정도 떨어져 자리 잡은 봉우리다. 단지봉에서 남산제일봉에 이르는 능선길은 가야산 전경을 두루 조망할 수 있고, 숲이 내뿜는 진한 향기에 젖을 수 있다. 다만 비지정 등산로여서 등산이 제한되는 것을 아쉬워하는 등산인들이 적지 않다.

보통 남산제일봉에 올라 하산 코스로 단지봉을 경유, 고운암으로 내려오지만 역순으로 등산로를 밟기로 했다. 날씨가 잔뜩 흐린 탓에 중간에 비를 만날 경우 되돌아올 것을 가정, 단지봉을 먼저 오르는 코스를 택한 것이다.

해인사버스터미널에서 상가 단지를 거쳐 500m쯤 올라가자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은 마장동을 거쳐 실버타운으로 이어지고, 왼쪽은 해인초등학교를 거쳐 고운암으로 오르는 길이다. 중암이란 푯말을 따라가면 고운암이 나온다. 삼거리에서 고운암까지는 약 1㎞ 거리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고운암은 가야산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암자다. 고운 최치원이 말년에 이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하며, 암자 이름도 그의 호를 땄다. 평일이어서인지 암자를 찾은 신도가 거의 없어 암자 분위기는 고즈넉하다. 고운암 왼쪽 골짜기로 들어선 후 단지봉으로 오르는 길은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아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며칠째 비가 내려서인지 계곡은 물론 사람이 다녔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등산로에도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비에 젖은 수풀을 헤치며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고운암에서 단지봉까지는 40분 정도의 거리지만 길이 가파른데다 물기를 머금은 흙길 등산로 탓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칠불봉, 우두봉, 남산제일봉 등 가야산을 대표하는 봉우리가 암봉인데 비해 단지봉은 흙으로 된 봉우리다. 단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모양이 펑퍼짐한데다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 있어 단지봉에 올랐지만 주변을 한눈에 조망하기 힘들었다. 표석으로 봉우리란 것을 짐작할 뿐이다.

단지봉에서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선 이후 남산제일봉까지의 '즐거운 능선 산행'이 시작된다. 어떨 때는 경사가 없는 평평한 길을 걷기도 하고, 어떨 때는 높이 100m 남짓한 고개를 넘기도 한다. 잔잔한 변화가 있어 지루하지 않은 산행코스다. 물기가 많은 땅엔 이름을 알 수 없는 버섯들이 잔뜩 고개를 내밀었다. 어른 손바닥보다 큰 놈도 있고, 모양과 색깔이 아름다워 독버섯으로 짐작되는 놈도 보인다.

단지봉에서 남산제일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수많은 나무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하늘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길에서는 소나무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한창 도토리가 여물어가는 참나무 길에서는 여름 날의 추억을 소곤거릴 수 있다.

또한 이 길은 사색의 길로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숲이 내뿜는 진한 향기에 젖은 채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인생을 반추(反芻·되풀이하여 음미하고 생각함)하기에 그만이기 때문이다.

비지정등산로여서 안내표지가 없다는 것이 이 등산로의 유일한 단점이랄 수 있다. 그러나 등산인들이 나무에 매달아 놓은 리본을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이넘이재, 날기재를 지나 남산제일봉까지 가는 등산로의 3분의 2 지점에서 모양새가 범상하지 않은 바위를 만났다. 높이가 10m가 훌쩍 넘는 우람한 바위가 다른 바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국립공원 가야산사무소에 물어도 바위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버선을 닮았다고 했다. 반대쪽에서 찬찬히 살펴보니 국보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얼굴을 닮기도 했다. 불교가 꽃을 피운 가야산에 딱 맞는 바위란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시쯤 고운암을 출발, 낮 12시 30분 남산제일봉에 닿았다. 비가 흩뿌리는데다 안개마저 잔뜩 끼어 주변 풍경을 제대로 조망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비경은 감탄성을 터뜨리게 했다. 빼어난 암릉미를 자랑하는 남산제일봉에 오른 후 해인사관광호텔 쪽으로 하산했다. 트레킹 코스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산행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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