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무렵
김 남 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이제 갓 네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올해 고추 농사가 영 시원찮다고 한다. 고추는 태양의 에너지를 머금고 있는 식물인데(그래서 고추를 먹을 때 땀을 뻘뻘 흘린다), 올 여름은 하루걸러 비가 왔으니 농사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이 고추밭 주인은 누구일까. 보름달 같은 흰 엉덩이 셋이 지심을 한껏 올려주었으니 올 가을 풍작은 확실히 보장받은 셈.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이런 미당의 말씀도 있거니와 달빛 아래에선 뭐든 흐벅지게 열매가 매달린다.
그런데 초승달이 귀밑까지 찢어지게 킬킬 웃는다? '엉뎅이' 깐 곳이 하필이면 고추밭이어서? 햐, 농담이로구나. 지난 80년대 '피가 졸아드는 두려움으로 시를 새기던' 혁명 전사의 시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여유와 해학이 있기에 이념덩어리 시에 실핏줄이 돋아날 수 있음이랴.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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