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밤마실

시골로 이사가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지인이 한번은 미국인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저녁 식사 후 지인 부부는 그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친구들에게 한국의 '밤마실(밤마을)' 문화를 경험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시골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할머니 혼자 사는 이웃집은 이미 불이 꺼져있었다. 약속도 없이 그것도 밤에 불쑥 남의 집에 간다는 것에 미국인 친구들은 매우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할머니, 할머니' 부르자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전등불 켜는 소리. 할머니는 두 눈을 비비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잠을 깨웠음에도 전혀 불쾌해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할머니의 좁은 온돌방에서 그들은 함께 이불 밑에 발을 넣은 채 두런두런, 깔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은 달빛으로 환해져 있었다.

밤마실! 마을의 어르신들, 떠꺼머리 총각·처녀들, 젊은 새댁이며 아주머니들은 끼리끼리 누구네집에 모여 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세상사 얘기를 풀어놓곤 했다. 한켠에선 새끼를 꼬는가 하면, 뚫어진 양말에 전구를 넣어 꿰매기도 했고, 뜨개질이며 수를 놓기도 했다. 여름이면 마을앞 강에서 더위를 식히고, 조약돌 위에 드러누워 밤하늘 별을 바라보기도 했다. 출출해지면 고구마도 깎아먹고, 한 줌씩 가져온 쌀로 밥을 지으면 김치 한 가지라도 꿀맛이었다. 더러는 이웃집 밭에서 참외서리니 콩서리를 하며 킬킬거리기도 했다. 그것은 시골의 일상적이고도 수더분한 밤놀이 문화였다.

일본 요코하마에 사는 친구가 처음 일본살이 할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부침개를 구워 한국식 인정으로 한 접시 들고 옆집에 갔다. 우리 같으면 어서 들어오시라고, 팔을 끌었을 만한데 이웃 주부는 미소를 지으며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만 할 뿐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더란다. 할 수없이 현관 앞에 서서 한참 얘기 나누다 돌아왔다고 했다. 미리 전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우리도 많이 달라졌다. 약속 없이 불쑥 찾아가면 '무례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쉽다. 흐릿하게 남아있는 밤마실 문화도 머지않아 사라지지 않으려나. '문화미래 이프' 라는 서울의 한 단체가 5일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4회째 밤마실 문화를 가진다고 한다. 지난날 살갑던 이웃 간 정의 추억을 재현하겠다는 거다. 고층 빌딩과 차량 소음들로 둘러싸인 서울 도심, 별빛 하나 찾기 힘든 그곳에서의 밤마실 축제…. 어쩐지 안쓰럽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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