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號(호)

중년에 접어들면서 곤란한 것 중 하나가 친구들 간 호칭문제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데도 초등학교 시절 그대로 '철수야' '영희야'로 부른다. 어린 시절 정감이 담겨있어 좋을 때도 있지만 어딘지 '품격'이 떨어지는 것 같아 듣기 거북할 때가 많다. 물론 직책이 있을 때는 김 부장, 이 과장 식으로 부르지만 갓끈 떨어지면 아무래도 다른 이름 하나가 더 있는 것이 좋다. 바로 우리 선조들이 號(호)를 지어 부른 이유다.

추사 김정희는 동지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약관 24세에 중국 연경길에 오른다. 그리고 거기서 스승 박제가로부터 명성을 익히 들은 琓元(완원)을 만난다. 완원으로부터 경전공부는 반드시 사실에 입각하여 정밀하고 상세하게 풀어야한다는 말을 듣고 추사는 끓어오르는 감개를 억누를 길 없어 "이제부터 감히 저의 새로운 호를 선생의 성씨 琓(완)을 사용하여 琓堂(완당)으로 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김정희는 이렇게 하여 '완당'이라는 또 하나의 호를 얻게된다.

다산 정약용은 고향집 현판에다 與猶堂(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붙여 자신의 굴곡진 삶을 표현했다. 여유당은 老子(노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를 남달리 사랑한 정조가 의문 속에 사망하자, 엄청난 시련이 닥칠 것을 예견하듯 여유당으로 지은 것이다. 정조없는 세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말해주는 멋진 당호다.

호는 나이가 들어 본명이나 字(자) 대신에 부르는 이름으로 개인의 취향이나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 많다. 시인 오상순은 평소 꽁초담배를 즐겼다고 해서 호를 空超(공초)로 했고, 독립투사 윤봉길은 매화의 절개를 본떠 梅軒(매헌)이라 했다. 추사와 교류가 깊었던 해남 대흥사의 승려 의순은 풀 옷 같은 누더기를 입고 다녔다고 해서 호가 草衣(초의)였다. 얼마나 멋들어진 이름인가.

대구지역의 한 학당에서 수십명의 인사들에게 호를 선사한다고 한다. "호를 부른다는 것은 서로 평등하다는 뜻을 담고있다"는 학당 측의 설명이 솔깃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미국식 별칭은 갖고 있지만 선조들의 멋이 묻어 있는 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가을 서로 호를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는 벗이 그립다. 윤주태 중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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