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글읽기와 글쓰기)셋째 마당 : 제시문 읽기

둘째 과정 : 단락 간의 이면적 구조 읽기

표면적인 구조의 파악이 끝나면 단락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단락 사이의 관계 분석은 글의 심층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지난주 첫째 과정에서 파악한 의 내용을 단락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장관이 무엇이더냐? (2)장관이 많다. (3)장관이 없다. (4)북벌 이후에야 장관이 있다.

(5)북벌은 허상이고 중요한 것은 인민의 이로움이다. (6)기왓조각이나 똥덩이가 장관이다.

(1)에서는 논제가 제기되고 여행기에서 논(論)으로의 전환을 유도한다. (1)의 물음은 당연히 (2)의 대답이 나오리라 독자들은 기대한다. (2)의 대답은 일단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면서 독자들은 열거된 많은 장관들 중에 자신들이 생각한 장관이 있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만족은 (3)에 와서 여지없이 부서진다. 사(士) 중에서도 상사가 '도무지 볼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독자들은 아연 긴장한다. 분명 중국은 아주 넓고 장관도 매우 많을 것인 데도 볼 것이 없다고 단언하는 상사의 저의가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어째서 아무런 볼 것이 없더냐?"라는 물음으로 독자의 의문을 그대로 전한다. 그러자 상사는 "머리를 깎으면 곧 되놈이요, 되놈이면 곧 짐승일지니 우리가 짐승에게 무엇을 볼 것이요?"라고 되묻는다. 어떤 공덕과 학문, 문장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머리를 깎으면 오랑캐이고 오랑캐에게는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비장감조차 감도는 단호한 어조이다. 독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필자도 으뜸가는 의리를 이야기한다 하면서 이야기하는 이도 잠잠하고 듣는 이도 옷깃을 여민다고 상사를 옹호한다. (4)에서의 중사의 주장은 (3)이 더욱 심화되고 논리화되어 나타난다. 명이 오랑캐인 청에게 망한 사실을 되새기면서 성인의 자취가 야만의 것으로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10만의 군사로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소탕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한다. (3)에서 이야기되던 무조건적인 적의가 화이관으로 논리화되면서 결국 북벌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당시의 가장 예민한 문제인 대의에 대한 것으로 나아가면서 긴장은 최고조로 올라간다. 북벌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천하의 장관이 모두 부질없는 단순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필자도 이는 춘추를 잘 읽은 이의 말이라 하여 그를 옹호한다. 이어 명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명의 패망을 가슴아파한다. 또한 그 명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면하려는 마음이야 어찌 하루도 잊을 수 있었으랴고 하면서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춘추 존양의 이론을 백년을 하루같이 이어왔으니 장한 일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독자들도 일반적인 장관에 대한 생각을 잊고 필자의 의도에 따라 주먹을 불끈 쥐고 북벌을 부르짖는다. 긴장은 고조되고 일종의 전운이 감도는 듯하다. 독자들의 눈에는 부서진 산해관이 보이고 회복한 중원이 눈 아래 굽어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긴장은 (5)에 와서 논리적인 저항에 직면한다. 존주는 존주이고 이적은 이적이라는 저항이다. 즉 존주의 사상은 주를 높이는 데만 국한될 것이요, 이적의 문제는 이적에서만 쓸 일이라는 의미다. 청은 비록 이적일망정 실로 중국이 이로워서 길이 누리기에 족함을 알고 이를 빼앗아 웅거하되 마치 본디부터 지니었던 것같이 해서 중국의 모든 문물과 씨족, 법률, 제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청을 물리치려면 우선 우리가 개화하여 그들로부터 실사구시를 배워 우리 인민들을 이롭게 한 다음 인민들이 마련한 회초리로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한 연후에야 장관이 없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3)과 (4)에서 고조되었던 북벌과 청에 대한 적의가 (5)에서는 우리 스스로의 반성과 자강으로 전환된다.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인 복수심에 대한 경계이다.

(6)에서는 스스로를 하사라 하였다. 그러면서 논한 장관은 그 무엇도 아니고 기왓조각과 똥덩이다. 이러한 서술은 지금까지 긴장해 있던 독자들의 기대 심리를 일시에 파괴하면서 충격과 함께 그 반대급부로 웃음까지 머금게 한다. 이제 독자들은 왜 기왓조각이나 똥덩이를 내세웠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의문은 기왓조각이나 똥덩이의 쓰임이 어떠한가 하는 필자의 논평에 의해 하나씩 해소된다. 다른 사물들을 내세웠을 법한데 기왓조각이나 똥덩이를 내세운 것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흥미를 유도해서 필자의 의도를 성취하려는 고도의 수법이다.

그런데 연암이 을 형상화하는 수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즉, 단락 사이의 순차적인 전개 방식뿐만 아니라 더욱 주목되는 것이 단락 상호 간의 관계 양상이다. 단락 간의 순차적인 전개 양상으로 볼 때 에서의 궁극적인 의미는 (6)에 나타난 의미일 것이다. 이른바 '기왓조각과 똥덩이'로 대변되는 실사구시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긍정과 부정의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주장된 것이며 스스로 하사라고 하면서 연암 자신의 의견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암은 단순히 (6)만을 중심 의미로 삼지 않았다. (2)(3)(4)(5)(6)에 각기 나타난 의미를 모두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연암 자신도 자신의 논평으로 그것을 긍정한다. 문제는 그러한 의미들이 전쟁에서 각기 어떠한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다. 의미들은 상황에 따라 서로 화합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전쟁에 참여한다. 전쟁의 양상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하다. (3)과 (4)는 (5)를 매개로 하여 (6)에게 격파되고 있다. 격파의 수법은 교묘하다. 단순히 표면만 쫓다가는 격파함도 격파됨도 알지 못한다. 연암은 정공법으로 (3)과 (4)를 부정하지 않고 (5)의 반론을 계기로 (6)의 상대적인 의미만 높여준다. 또 주목되는 부분이 (2)이다. (2)에서 장관으로 이야기된 '요동들, 구요동 백탑, 연로의 시가와 점포, 계문의 내낀 숲, 노구교, 산해관, 각산사, 망해정, 조가패루, 유리창, 통주의 주점, 금주위의 목축, 서산의 누대, 사천주당, 호권, 상방, 남해자, 동악묘, 북진묘'등은 당시에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면 누구나 장관이라 이야기하던 곳들이다. 연암 자신도 다른 부분에서 이들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런데 그것이 (3)과 (4)의 화이론적 관념에 의해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이다. 화이론적 관념은 '볼 것이 없다'는 말로 (2)의 장관들을 전면 부정한다. 그런데 (3)과 (4)는 (5)를 매개로 하여 (6)에 의해 부정된다. '볼 것이 많다'가 '볼 것이 없다'에 의해 부정되고 '볼 것이 없다'가 '볼 것이 있다'에 의해 다시 부정된다. 그렇게 볼 때 (2)가 (6)에 의해 긍정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 (6)에 나타난 장관은 (2)의 장관이 아니고 '기왓조각과 똥덩이'이다. 따라서 (2)도 자연스럽게 부정된다. 이렇게 볼 때 (3)(4)와 (6)은 표면적으로 대립되는 듯하지만 공동으로 (2)를 공격하여 격파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공동 전선을 펴게 해 준 것이 (5)이다. 이질적인 (3)(4)와 (6)을 결합시킨 것이 바로 (5)인 것이다. 단락 간의 순차적인 전개 양상에서 드러나지 않은 (5)의 중요성이 새삼스레 부각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1)~(6)의 전개는 밀접한 내면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느슨하고 이완되어 독립적인 단락으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서술자의 의도와 독자의 기대를 전반적으로 고려하면서, 완결된 진술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고도로 조직된 완결성이다. 질문으로 의문을 제기하는가 하면 필자의 논평으로 의문을 해소해 주고 독자의 기대 심리를 상승시키기도 하고 일시에 파괴하기도 한다.

이처럼 은 의문과 논평, 기대와 기대의 파괴, 긍정과 부정이라는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그러한 것들이 을 한 편의 독립된 글로 형상화시킨다.

한준희(대구통합교과논술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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