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위조품과 모사품

우리들의 삶이 거짓과 가짜에 시달리고 있다. 정치판에서 내뱉는 거짓말은 예사가 된 지 오래이며, 가짜 양주, 가짜 휘발유, 가짜 명품, 가짜 지폐, 최근에는 가짜 학력까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예술의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진작을 가장한 위작이 한편에서 유통되고 있다.

위조품은 진짜를 흉내 낸 가짜이며 그래서 진짜보다 질적으로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때로는 진짜와 똑같이 빼닮아 있고, 심지어는 정말로 진짜 같은 경우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네덜란드를 무대로 하여 일어난 17세기 화가 페르메르 위작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위조품을 제작한 메헤른 자신은 자기의 범행을 인정하는데도, 사법 당국은 그 자백을 부정하는 진기한 일조차 벌어졌다. 여하튼 우리의 육안으로는 진작과 위작을 구별하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런데 위조품 말고도 모사품이라는 것이 있다. 화가로서 수학시절에 기법습득을 위해서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는 연습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너무나 똑같이 그렸고 심지어 대가의 사인까지 그대로 그렸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대가의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기에서 일어난 결과는 위조품의 경우와 아무것도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조품이라 부르지 않고 모사품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그림을 예술작품·위조품·모사품으로 분류하려고 할 때, 그 분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산출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 그림이 어떠한 행위의 소산인가에 따라,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위조품이나 모사품에 대해 우리가 감상이나 해석이라는 작업을 포기하는 것은,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작가의 행위가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감상자가 작품으로 생각해 줄 것으로 믿고 세상에 내놓으며, 감상자는 그 그림이 작가의 그러한 성실한 행위의 소산이라고 믿고 감상한다. 여기에는 예술작품을 매개로 하여 인간 상호 간의 신뢰에 의해 지탱되는 커뮤니케이션이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신뢰관계가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모든 것을 잊고 작품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위조품은 이러한 신뢰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하나의 '배반 행위'이다. 그러므로 가짜나 거짓을 앞에 두고 우리가 그 질적 수준을 논하는 것은 원초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가짜학위 소동을 둘러싸고 실력을 운운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식(영남대 조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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