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기가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다. 편리함을 제공하는 디지털 기기들은 그러나 사용 흔적을 남긴다. 문제는 저장된 데이터는 물론이고 사용 기록도 삭제하기 어렵다는 점. 무심코 버리거나 중고로 내다 판 컴퓨터에 신상 정보나 공인인증서 등 중요 정보들이 유출될 수 있다.
◆보이지 않을 뿐 지워지지 않는다.
신정아-변양균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두 사람 간의 e메일 100여 통을 신 씨의 컴퓨터에서 찾아내 화제가 된 바 있다. 신 씨는 자신의 컴퓨터에서 데이터를 삭제했지만, 그 메일들은 지워진 것처럼 보였을 뿐 하드 디스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검찰은 하드 디스크 파일 복원을 통해 e메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삭제 파일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저장 매체의 기록 방식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파괴해 없애지 않는 한 디지털 저장매체에 기록된 정보들은 삭제·휴지통 비우기를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운영체제(OS)를 지우거나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
e메일은 메일 서비스 업체의 서버에 보관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메일 지원 프로그램인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사용할 경우 사용자의 하드 디스크에도 저장된다. 예를 들어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웹 메일을 쓰더라도 이를 아웃룩 익스프레스와 연결해 쓰면 사용자의 PC에도 저장된다. 신 씨의 경우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썼기 때문에 변 씨와 주고받은 메일들이 그녀의 하드디스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버린 PC에서 정보 줄줄 샌다
대구지역의 보안솔루션 업체인 (주)에스엠에스의 서미숙 과장은 "신정아 사건 이후 파일 복구 방지 소프트웨어에 대한 문의 전화가 관공서나 기업으로부터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처분한 PC에서 자신의 소중한 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데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도는 아직 낮다. 개인 정보나 기업의 중요 정보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컴퓨터 본체를 폐기하거나 중고로 팔 경우 심각한 피해를 당할 수 있다.
2004년 KAIST가 발표한 '개인정보 유출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 경매를 통해 구매한 41개의 PC 가운데 30%에서 1천349명 분의 개인정보가 발견됐다. 주민등록번호, 거주지, 이름은 물론이고 인터넷 뱅킹 사용내역까지 들어 있었다. 보험회사에서 중고로 매각한 컴퓨터에서는 개인정보가 무더기로 발견됐으며, 버려진 컴퓨터에서 얻은 760명의 신용카드번호를 이용해 거액을 챙긴 범인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2004년 독일의 암호기술전문업체인 포인트섹(Pointsec)이 경매 사이트 이베이를 통해 구매한 하드 디스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개 중 7개에서 읽을 수 있는 정보가 여전히 담겨 있었다.
최신 통계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상황은 더 심각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특히 중고로 거래되거나 기증되는 PC들은 개인 및 기업 정보 유출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일부 공공기관의 경우 내구 연한이 다 된 PC를 처리하면서 보안 검증이 제대로 안 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정보를 삭제하거나 포맷한 뒤 기증하고 있다.
◆디지털 빅브라더?
국가정보원 같은 기관은 국가기밀이나 중요자료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저장장치 삭제 기준을 포함한 '정보시스템 저장매체 불용 처리 지침'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정보의 중요도나 저장매체의 특성에 따라 ▷완전 파괴 ▷자력 소거 장비로 자료 삭제 ▷완전 포맷 3회 ▷완전 포맷 1회 등 삭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이상 그 행동 기록들은 어딘가에 속속들이 저장될 수밖에 없다.
이동통신회사의 서버 컴퓨터에는 이 순간에도 휴대전화 가입자들의 위치가 기록되고 있다. 이 기록들은 실종된 사람의 수색 자료로 활용되기도, 범죄 용의자가 거짓 주장하는 알리바이를 뒤집는 증거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가입자들의 발신 통화 이력은 12개월간, 착신 이력은 6개월 동안 보관된다.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은 내력도 6개월 동안 보관된다. 휴대전화 메모리에 저장된 통화 내역과 문자 메시지 정보 역시 사용자가 삭제하더라도 PC에서와 유사한 방법으로 복원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완벽한 정보망으로 개인의 생활을 감시하는 '빅 브라더'의 존재를 예언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디지털 기기라는 빅 브라더에 둘러싸여 있는지도 모른다.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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