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인디언의 성지②-美 애리조나주 모뉴멘트 밸리

백인과 결사 항전…나바호 부족 슬픈 영혼이 깃든 황무지

초입길에서부터 모뉴멘트 밸리(Monument Valley)가 선사하는 시각적 경험은 놀라웠다. 적잖은 영화와 CF의 배경화면을 통해 익히 봐왔던 터였다. 시각 경험의 면역 주사를 미리 맞고 현지를 방문한 셈이다. 그러나 끝모를 허허벌판 위에 우뚝 솟은 바위 기둥이 지평선과 어우러져 연출해 내는 기이한 경치는 생각의 흐름을 압도했다.

◆시야를 압도하는 황무지

모뉴멘트 밸리는 미국 중서부에 살고 있는 최대 인디언 부족 나바호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땅이다. 어디를 향해 앵글을 들이대도 캘린더에서 봄직한 장면들이 담긴다. 하늘을 찌를 듯하거나 비틀어진 채로 서 있는 돌 기둥들의 향연이었다. 수억 년 동안의 풍화작용으로 이 같은 지형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각적인 경험은 잠시일 뿐이었다. 모뉴멘트 밸리는 황량한 땅이었다.

"그곳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됩니다."

출국 전 국제전화로 연결된 재미교포 나바호 킴(55·한국명 김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23년 전부터 L.A에 살고 있는 나바호 킴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나바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동정적인 시각으로 다룬 국내 언론사들의 보도를 예시하며, 나바호 사람들이 언론의 호기심 거리가 되는 것을 마뜩잖아했다.

"황무지이긴 해도 모뉴멘트 밸리는 나바호 사람들이 목숨 바쳐 지키려던 신성한 땅입니다."

◆나바호족의 숙명적인 선택

자동차를 몰고 모뉴멘트 밸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숨 막히는 뜨거운 사막 바람에 붉은 먼지가 풀풀 날렸다. 과장 좀 하자면 먼지 한 됫박을 들이마신 것 같다.

그곳에서 기념품을 파는 여인 샤논 스펜서(32)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이 당신들에게 성스러운 땅인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여기는 우리 조상들이 거룩한 의례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또한 내 할아버지가, 남편의 할머니가 이곳에 묻혔다. 이곳은 성지다. 백인들은 금을 찾으려고 이 땅을 침략했다. 조상들은 죽음으로 내몰렸지만 정작 금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부 개척의 역사는 원주민에게는 멸망의 역사다. 1860년대 미국 정부의 원주민 토벌 작전이 시작되면서 나바호족에게도 비운이 닥쳤다. 결사 항전했지만 패배한 8천500여 명의 나바호 포로들은 560㎞ 떨어진 뉴멕시코주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고난을 당한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4천 명뿐이었다.

몇 년 뒤 미국 정부는 나바호족과 협정을 체결하면서 기름진 동부의 목초지와 포로수용소 부근의 땅을 제시했다. 그러나 나바호족이 선택한 곳은 불모지 모뉴멘트 밸리였다.

◆캐니언 드 셰이의 비극

모뉴멘트 밸리에서 자동차로 3, 4시간 거리에 있는 캐니언 드 셰이(Canyon de Chelly) 역시 비극의 역사를 담고 있다.

캐니언 드 셰이는 목가적인 풍경의 협곡이다. 푸른 숲과 목초지에서 양떼가 노닌다. 황량한 캐니언 일색인 미국 서부에 이런 기름진 협곡이 존재하는 것이 경이롭다. 절벽 위 움푹 파인 곳에는 고대 원주민 아나사지족의 유적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목가적인 곳이 나바호족의 마지막 항전지였다. 나바호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전에도 이곳에서는 스페인 군대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다. 군대가 쳐들어오자 나바호 사람들은 아나사지 동굴집으로 피신했다가 노약자와 여인을 포함한 110명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 용감한 나바호 여인이 스페인 군인을 껴안고 논개처럼 절벽 아래로 떨어져 함께 죽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영혼의 소리

나바호족의 언어는 복잡한 체계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치 바람결이 속삭이는 소리 같다고 한다. 미국 정부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싸우면서 나바호족의 언어로 암호를 만들었던 실화는 영화 '윈드 토커'(Windtalkers·2002)의 토대가 됐다.

모뉴멘트 밸리와 캐니언 드 셰이는 나바호 원주민들이 숙명적으로 사랑한 땅이며 그들의 피가 스며든 땅이다. 거대한 돌기둥과 붉은 흙 언덕을 휘감아도는 바람 속에서 지금도 후예들은 선조들이 전하는 영혼의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 모뉴멘트 밸리에서 글·사진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 모뉴멘트 밸리

▷위치:미국 애리조나주 모하비 사막 나바호 자치구역 내.

▷가는 길(자동차 기준):LA→모뉴멘트밸리(9, 10시간)/라스베이거스→모뉴멘트밸리(6, 7시간)

▷나바호 자치구역은 남한 면적 3분의 2 정도다. 나바호족은 이곳을 '나바호국(Navajo Nation)'이라고 부른다. 모든 행정은 나바호 자치정부가 맡아 하고 있다.

♠ 아메리카 원주민 잔혹사

인류 최대의 인종 대청소가 일어난 곳은 놀랍게도 미국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1492년쯤 북미 대륙에는 1천만 명에서 수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원주민들이 살았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수는 400만 명에 불과하다.

적어도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에 이르는 인디언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직접적인 학살도 있었지만 천연두 같은 질병에 의한 감염사도 많았다. 심지어 백인들은 원주민에게 휴전하자고 속인 뒤 천연두가 들어있는 담요를 선물하기도 했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원주민에 대한 세균전을 자행한 것이다.

동부 지역을 장악한 백인들은 원주민을 서부 황무지로 내몰았다. 그러나 황무지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비극은 이어졌다. 대륙횡단철도가 놓이고 백인들은 대학살을 자행했다. 1890년 12월 미국 제7기병대는 사우스 다코타 주의 운디드니(Wounded Knee)에 숨어있던 인디언 350명 중 300명을 학살한다. 학살은 막을 내렸고 자유를 향한 원주민들의 꿈은 운디드니에 묻혔다.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보호구역 이름 아래 '유폐'돼 있다.

김해용기자

♠ 사라진 아나사지족의 미스터리

현재 미국에 있는 원주민들도 터줏대감은 아니다. 서기 1200년까지 미국 서부지역에는 아나사지(Anasazi)라는 고대인들이 살았다. 아나사지는 나바호 말로 '옛사람'이라는 뜻. 애리조나·유타·뉴멕시코·콜로라도 접경지역에 찬란한 유적을 남긴 아나사지 문명은 페루의 잉카 유적에 비견될 만하다.

대표적인 것이 '절벽 궁전'. 그들은 절벽 아래 움푹 파인 곳에 흙벽돌 복층 구조의 집을 지었다. 절벽궁전은 인류 최초의 아파트형 거주공간이다. 콜로라도주 남쪽 '메사 베르데(Mesa Verde)' 국립공원에 있는 절벽궁전은 4층 구조에 방이 217개다. 절벽궁전은 애리조나주 세도나 인근 몬테주마 캐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아나사지족은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수백 년 전인 1200년 전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발견 당시 유적엔 음식물 흔적이 있었고 정리정돈돼 있었으며 외부 침입 흔적이 없었다. 많은 학자들은 ▷집단 이주 ▷가뭄 등 자연재해로 멸망 ▷외부 침입 ▷자멸 등 여러 학설을 내놨지만,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김해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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