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국어를 국어답게

영어 상용은 계급의식의 발로…보물 쥐고도 갈고닦지 못하니

중국은 역사적으로 네 번이나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遼(요)나라의 거란족, 金(금)과 淸(청)의 여진족, 元(원)의 몽고족 등이 그것이다. 오랜 이민족 지배로 순수 한족 혈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거란족, 여진족도 자신들의 민족국가 유지에 실패해 역사에서 통째로 지워졌다. 이 점에서 보면 동방의 조선이 끈질기게 민족국가를 유지한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 할 만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먼저 조선이 중국 못지않은 文治(문치)주의 국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야만 국가였던 거란, 여진과 달리 중국문화에 대항할 만한 문화적 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독창적 문자 체계를 갖춤으로써 민족 주체성을 더욱 튼튼히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역사적 굴절을 버텨온 것은 실로 이 두 수레바퀴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

이 중에서 문자만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보면 다소 아슬아슬한 감이 없지 않다. BC 2세기에 한자가 수입되기 전에는 아예 우리글이 없었고, 7세기 말 설총의 이두 정리로 반쪽이나마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가 거의 700년이나 지속되다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로 온전한 문자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세계 최고의 걸작은 연산군에 의해 반쯤 매장돼 버렸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 구한말 주시경 이후에야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이런 문자역사의 굴절과 훼손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참담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몇 달 전 역사학계에서 제기한 문제다. 국호 高句麗(고구려)의 우리말 원 발음은 '고구리'인데 이와 소리가 비슷한 한자(고구려)를 써오다 그것이 굳어버려 지금은 고칠 수도 없게 됐다는 이야기다. 강감찬은 강한찬, 견훤은 진훤, 내물왕은 나물왕이 맞다는 주장도 곁들여졌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오류들이 불과 100년 전에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조상의 나라,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면목 없는 후손이 되고 만 것이다.

문자에 대한 후손의 무지와 비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훈민정음 서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천지간에 자연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에 맞는 문자가 있을 것이니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할 것 없이 모두 한글로 적어낼 수 있다(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雖風聲鶴?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는 내용이다. 세종대왕의 뜻은 우리글의 표기양식이 무궁무진하니 민족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게 가려서 잘 쓰라는 당부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자생활은 대왕의 기대와는 딴판인 길로 가고 있다. 요즘 정부나 자치단체, 대학, 연구소 등의 상용어들을 보면 과장해서 한글 반, 영어 반이다. 이런 추세로 가다간 한글은 조사밖에 남지 않겠다는 우려를 갖게 된다. 관용어가 되다시피 한 영어 단어 매니페스토, 커밍아웃, 아카이브, 허브, 콜로퀴엄, 워크홀릭, 인프라, 로드맵, 시프트 등은 고등어휘다. 우리의 중고등학교 기본어휘 및 학습어휘 7천500개, 대학 교양어휘 4천 개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단어뿐 아니라 어구까지 영어투성이다. '네이버 워치', '팜 뱅크', '임베디드 시스템', '주얼리 로드 쇼', '프린지 페스티벌'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국제 교류가 있으면 외국어나 외래어의 유입은 불가피하다. 때문에 자국 언어의 완전무결한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정보사회의 도래로 그런 추세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우리의 선택은 외국어, 외래어를 어느 정도 빌려 쓸 것인가에 있는데, 고학력 국민들조차 의사소통을 걱정해야 할 정도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영어의 남용으로 국민 다수가 한국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통일 이후 북한 주민들이 느끼게 될 당혹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영국에서는 어려운 영어 쓰기가 국민의 愚民化(우민화)를 불러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며 '쉬운 영어 쓰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영어에 영혼까지 빼앗기고 있는 우리 현실은 우민화 이상의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그 주범은 영어 상용을 과시하는 지식계급이다. 어려운 한자로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해 민권신장을 가로막았던 조선 양반들의 재현이 아닐 수 없다. 여진, 거란족이 중국에 동화돼 버린 역사가 새삼스러운 문화의 달이다.

박진용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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