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 한잔의 단상] 맞선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중추가절이 지나고 나면 마음 바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총각 노처녀들입니다. 엄동설한 독수공방, 매년 되풀이되는 혹한기 단독훈련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평균온도 36.5도, 연료걱정도 없는, 남들은 그냥 줍듯이 가지고 있는 그 흔해빠진 월동 장비 하나를 장만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제법 넓은 호텔커피숍입니다. 외톨박이로 앉은 남과 여가 마치 콩 말을 쏟은 듯 흩뿌려져 있습니다. 한쪽 구석에 앉은 남녀는 이미 꽈배기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치열한 탐색전이 벌어집니다. M의 마주잡은 손바닥에 땀이 고입니다. 설렘이 오히려 어색하게 보일 마흔 중반의 나이, 수십 번 반복한 일인데도 두근거림은 갈수록 커집니다.

용기를 내어 주위를 휙 둘러봅니다. 쇼우 윈도우의 인형처럼 진열된 뻣뻣한 군상들이 보입니다. 나름대로 선별작업에 착수합니다. 커피타임, 저녁식사, 술자리, 가요방, 애프터 급으로 등급을 매깁니다. 바로 버스노선을 물어야 할 대상도 있습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늘 하는 기도를 합니다. '대중교통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해 주소서'

딸랑딸랑~, 천둥처럼 들리는 방울소리, M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마치 라운드 걸처럼 우아하게 걸어오는 종업원, 손에 들린 황금색 패찰이 클로즈업됩니다. '경산 아지매'. 드디어 전담마담뚜가 등장하신 것입니다.

맞선분야에선 베테랑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M, 적이 실체를 드러낼 때까지는 주시하기만 한다는 기본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움직이면 폭탄을 건드릴 수 있다.' 항상 조용히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몸은 머리와는 별개입니다. "여긴데요" 번쩍 손을 듭니다. 멀리서 경산 아지매가 날듯이 뛰어옵니다. "총각 일찍 왔네요, 이리 오이소"

이번 명절 내내 온 집안식솔들이 세뇌를 했습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심지어 협박까지 합니다. '더 늦어지면 처녀장가는 힘들다' 그러나 참으로 오묘한 것이 세상사입니다. M의 손을 잡은 경산 아지매의 발걸음이 애프터 급 킹카 쪽으로 향해 가다가 바로 직전 테이블에서 멈춘 것입니다. "앉아요, 총각"

다소곳이 고개 숙인 상대방은 선이 곱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상대성의 법칙, M이 고개를 들면 뒤편 킹카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조목조목 비교되기 시작합니다. 눈, 코, 입, 이마, 머리카락.... 시간이 지날수록 멀리 앉은 킹카의 머리핀 색깔이 더 선명해집니다. 월동장비 마련의 막중한 임무와 처지를 잊은 M, 결국 한마디 하고 맙니다.

"댁에 가는 버스가 몇 번입니까?"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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