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체험학습] 경주 대왕암

신라 문무왕 호국의지 서린 수중왕릉

▲ 대왕암, 감은사지, 월성 원자력발전소(사진 위로부터).
▲ 대왕암, 감은사지, 월성 원자력발전소(사진 위로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 30대 문무왕의 무덤(문무대왕릉, 사적158호)이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해안에서 약 200m)의 바위섬에 있는 수중왕릉으로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드문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러면 삼국통일이라는 큰 업적을 남긴 문무대왕의 무덤이 어떻게 바다의 작은 돌섬에 만들어 졌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신라로 침략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절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왕은 죽음을 앞두고 "화려한 능묘란 한갓 재정만 낭비하고 거짓만을 책에 남기며 공연히 사람들의 힘만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내 죽은 뒤 열흘이 되면 궁문 밖 뜰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내라. 그러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후 681년 문무왕이 돌아가자 아들인 신문왕은 부왕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지내고 왕릉을 만들었다. 이듬해인 682년에는 문무왕이 짓던 절을 완성하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感恩寺)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신문왕이 바닷가에서 대왕암을 바라보며 절하던 곳을 이견대(사적129호)라 부르며, 만파식적의 얘기도 함께 전해진다.

대왕암의 형태는 화강암으로 된 바위에 십자 형태의 암석 틈(절리)이 굵게 나있고, 바위의 중앙은 깊게 패여 작은 연못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물길을 내어 파도가 치면 동쪽 수로를 통해 물이 들어오고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된다. 한가운데에 길이 3.6m, 너비 2.85m, 두께 0.9m의 거북 모양의 직사각형 바위가 남북방향으로 놓여있는데,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의 유골을 봉안한 것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또한 대왕암의 서쪽 산기슭에는 대종천을 앞에 두고 감은사가 자리잡고 있다. 감은사의 내부는 금당 밑에 동해쪽으로 통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물을 따라 절 안으로 드나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조건에서는 하천에서도 멀고 해수면도 낮아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1천300여 년 전인 당시는 어떠한 환경이었겠는가? 지구상의 기후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여러 번 겪었고, 역사시대에도 소빙기와 온난기가 반복되고 있다. 대종천 유역의 지형조사에 의하면 당시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약 1.5m 정도 높았다고 한다. 이 높이의 수위가 되면 돛단배나 작은 어선들이 충분히 떠다닐 수 있는 환경이 된다고 한다. 실제로 감은사지 앞의 용늪에는 배가 닿는 선착장 시설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에는 대왕암에서 감은사까지 바다와 만으로 이어지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용으로 승화된 문무왕이 동해를 오갈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신라인들은 문무왕이 동해의 왜구를 막고 나라를 보호해 준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호국의식을 가지기를 바라는 의도가 배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왕암에 대한 Q&A

▷ '만파식적'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가?

문무왕이 죽자 유언대로 동해의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에 장사를 지냈다. 훗날 신문왕은 바닷가에서 대나무를 줍게 되고,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다. 그 뒤로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피리를 불면 왜구가 물러가고, 가뭄에 비가 오고, 질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피리소리를 듣고 국난을 해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연유로 바다의 거친 물결과 같은 많은 어려움을 잠재우는 피리라고 해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있다.

▷ 대왕암에는 과연 문무왕이 묻혀 있을까?

문무왕의 무덤인 대왕암의 실체가 조사되기 전까지 왕릉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었다. 대왕암 밑에 석곽을 만들어 시신을 수장했다는 설, 화장후 뼈를 납골하여 묻고 고인돌처럼 덮개석을 놓았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대왕암 밑에는 부장품이나 납골이 있다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2001년 대왕암 실체조사가 있었는데, 지하암반의 구조에 대한 지하투과레이더 탐사와 지하 부장품 유무에 대한 전자 탐사의 결과 대왕암 밑에는 특별한 무덤 장치도 없고, 아무런 부장품도 발굴되지 않았다. 그것은 문무왕의 수중왕릉을 대왕암을 중심으로 성역화하고, 문무왕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킨다는 호국의식을 가시적인 상징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바위섬의 암석을 인위적으로 다듬어 왕릉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 이견대(利見臺)와 문무대왕릉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견대라는 것은 중국의 주역 가운데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글귀에서 취한 것으로,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통하여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도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시대의 건물터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신라시대 건물양식을 추정하여 1979년에 복원하여 이견정(利見亭)을 세웠다. 마루에 오르면 곧바로 대왕암이 눈 안으로 들어온다.

◆ 주변에 이런 곳도 있어요!

▷ 감은사지

감은사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 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쌍탑일금당식 가람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 터가 확인되었다. 삼층석탑(국보제112호)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는 탑으로 의미가 크다.

▷ 골굴사

동해안에서 감포 방향 20km지점에 위치하는 사찰로 신라 불교가 번창하던 6세기 인도(서역)에서 온 성인 일행이 바위산에 마애여래불과 법당을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석굴사원이다. 또한 사원 뒤쪽의 석회암은 암벽에 제비집 모양의 구멍(tafoni : 벌집바위)이 많이 나 있는데, 이는 석회암이 기온차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거나 바위에 스며든 물이 겨울에 얼고 녹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생겨난 풍화지형이다.

▷ 월성 원자력 발전소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로 총 4기가 운영 중이다. 이곳은 국내 원자력발전소에 적용되는 가압 경수로형과는 달리 천연우라늄을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운전 중에도 핵연료를 수시로 교체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최희만(영남삶터탐구연구회, 오성고 교사)

참고자료 : 삶터탐구활동 길잡이(대구남부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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