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권갑하 作 '우회를 꿈꾸며'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우회를 꿈꾸며

권갑하

군자교 지나 길은 인질로 잡혔다

끝은 보이지 않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문명에 지친 하루가 백미러 속에 갇혀 있다.

지급기한 다 넘긴 주머니 속 어음장처럼

자꾸 눈에 밟히는 새우잠 자는 들꽃들

미풍이 지날 때마다 강도 비늘 벗는다.

벌써 몇 시간째 차선을 앞다투지만

가 닿을 꿈의 자리는 가드레일처럼 구겨져

중랑천 검은 가슴 위로 맥없이 떠내려간다.

가장 늦은 귀가에도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온몸에 바퀴 자국 어지러운 젊은 가장이여

별은 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일까.

우회를 꿈꾸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핸드폰 배터리마저 깜박대는 월릉교 부근

그리운 불빛 하나 둘 문을 걸어 잠근다.

군자교니 중랑천이니 하는 걸로 봐 시의 배경이 얼추 짐작되는데요. 전 국토가 도시화로 치닫는 지금, 문명에 지치기는 지방이라고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꿈은 속수무책으로 구겨져 잠의 바깥쪽에 버려지고, 스스로 인질로 잡힌 길의 정체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늦은 귀가에 이른 출근. '온몸에 바퀴 자국 어지러운 젊은 가장'의 모습은 그대로 한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끝은 보이지 않고 되돌아 갈 수도 없는', 그렇다고 어디다 냅다 팽개칠 수도 없는, 오오 하릴없는 길 위의 생존.

핸드폰 배터리마저 꺼져 버리면 영락없는 길 위의 미아가 됩니다. 백미러 속에 갇힌 하루. 눈을 감아야 별이 보인다는 인식은 전망 부재의 현실입니다. 그리운 지상의 불빛들이 하나 둘 문을 걸어 잠그는 시간. 우회를 꿈꾸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을.

박기섭(시조시인)

최신 기사

mWiz
18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조국 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비상계엄 사과를 촉구하며, 전날의 탄핵안 통과를 기념해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극우 본당을 떠나...
정부가 내년부터 공공기관 2차 이전 작업을 본격 착수하여 2027년부터 임시청사 등을 활용한 선도기관 이전을 진행할 계획이다. 국토교통부는 2차...
대장동 항소포기 결정에 반발한 정유미 검사장이 인사 강등에 대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가운데, 경남의 한 시의원이 민주화운동단체를...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