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수성못에 관한 짦은 이야기

서쪽에서 동쪽으로 주소가 바뀌고 나서 나는 자주 수성못을 찾는다. 못은 아파트들이 즐비한 이 도시의 허파 같기도 하고 딱 들어맞는 문장 안에 찍힌 방점(傍點) 같기도 하다. 반짝이는 물비늘과 물 속에 몸 빠뜨린 나무들의 그림자와, 원색의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 무리 무리가 못의 풍경을 완성시킨다.

번들거리는 수면은 과거도 미래도 추억도 회한도 다 받아들인다. 더구나 가을의 못물은 온몸을 하늘에 포갠 채 아주 고즈넉하게 깊어간다. 우수에 젖은 나무들과 시월의 하늘도 잠시 수면 아래 잠기는 듯 보인다. 그 아래 도시의 불빛도, 이 시대의 무성한 말들도 용광로처럼 모두 녹여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녹색의 살갗을 수면 위로 밀어올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만 개의 물비늘들이 내게로 밀려와 다시, 수만 개의 떨림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저물녘 못가에는 불빛과 정적만 남고 아주 뜨거운 것들이 내 정신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요한 마음의 평정을 얻곤 한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출발점은 결핍이고, 혼돈과 고독으로부터의 피안이 아니라 초극이겠지만, 문학을 통해서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의 궁극 역시 정신의 평정이 아니었을까.

내 시가 빛들이 난무한 차고 단단한 수면 위에 피워 올렸던 수련의 상징은 결국 문학을 통해서 표출하고 싶은 언어이며 도달하고 싶은 피안이었을 것이다.

'…아주 작은 호수 하나를 가졌다네/ 한 주먹 안에 쏘옥 들어오는 우주 같은 거/ 손으로 싸안으면 손바닥 가득 환해지는, 아주 작은/ 호수 하나를 가졌다네/ 운무와 달빛, 그리고 조그만 봉분 하나/ 햇빛과 수초, 닳아서 헐렁해진 오래된 세월에 대해서/ 낮고 더운 목소리로 그는 말한다네/…/ 빛들이 난무한 차고 단단한 수면 위에/ 막 불 붙인 촛불 같은/ 그 뜨거운 육즙 같은, 그리하여 발그레 우주가 달아오른다네….('수련'중에서)

수성못에는 휴식을 즐기는 많은 시민들과, 슬쩍 마음의 현을 건드리고 스쳐가는 바람과 물비늘들, 그리고 생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던 어느 날의 내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운무와 달빛 그리고 닳아서 헐렁해진 오래된 세월에 대해서 낮고 더운 목소리로 말하는 호수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꽉 차거나 공허하게 비어있는 땅의 상처, 아니 지친 몸 쉬어가라는 쉼표 같기도 하고 딱 맞는 곳에 찍힌 방점 같기도 한 못의 둑길에는 아마, 어제보다 더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시가 문득문득 귓가를 스치는 가을날이다.

송종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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