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농촌의 가을

내가 살고 있는 비슬산 자락의 유가와 현풍들은 산으로 둘러싸여 경관도 수려하지만 대구 가까이 있는 곡창지대라 옛날부터 유개(유가) 쌀로 유명했던 곳이다.

올해는 유난히 결실기에 비가 자주 왔기 때문에 병충해와 일조량 부족으로 농민들의 마음을 사뭇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어쩌랴 가을은 제 시각에 도착해야 하는 기차처럼 성큼 다가와서 한아름 풍성한 기쁨을 선사한다.

한해의 마무리인 가을 들판은 우리의 식탁을 살찌울 튼실한 벼들로 가득하다. 옛날 같으면 벼를 낫으로 베고 논에서 잘 말려서 알맞은 크기의 단으로 묶어 리어카나 경운기로 싣고 오면 마당은 쌓아둔 볏단으로 가득했다. 그 시절은 일일이 사람 손을 빌려야 했기 때문에 탈곡은 주로 야간에 한다. 집집마다 백열등이 환하게 켜지고 엥엥엥엥… 탈곡기 소리가 밤새울 듯 요란했다.

그야말로 움직일 수 있는 일손이란 일손은 모두 동원해 할머니부터 아버지·어머니와 아이들까지 자기 할 일을 분담하여 결실의 기쁨을 맛보았다. 잠시 휴식 시간에 나오는 야참으론 찐고구마·땅콩·도토리묵·국수 등이지만 땀 흘리고 먹는 그 맛이란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진미고 가을의 참맛이었다.

요사이는 어떤가? 콤바인이란 일 잘하는 괴물 기계가 있어 한번 쭉 훑고 지나가면 탈곡된 짚은 논바닥에 깔리고 벼는 포대에 자동으로 담긴다. 온 가족이 합심하여 땀 흘려야 했던 일이 두 사람이면 족하다. 농촌에도 문명의 발달로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고 기계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는 것 같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벼가 어떻게 생겼는지, 쌀이 나무에서 따는 열매인지 잘 모르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다행히 모심기, 메뚜기 잡기, 벼 베기 등 다양한 농촌 체험학습이 있다하니 다소 마음이 놓인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 힘든 과정을 알면 소중함을 안다. 비록 기계로 농사를 짓지만 한 알의 쌀이 나오기까지 농부가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피땀 흘려야 토실토실한 알곡을 거둘 수 있다는 진리를 도시 아이들에게도 심어 줬으면 한다.

요즘 아이들은 밥보다 돈가스·햄버거·피자 등 서양음식이나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져 있다. 밥이 보약이라 하지 않았던가. 미래를 이끌어갈 주인들이 우리 것을 멀리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지만 농민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 농산물을 사용하는 식단으로 농민들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루과이라운드로 지금 농촌은 깊은 시름에 잠겨있다. 비료·농약 등 각종 농자재비는 배로 올랐는데 앞으로 쌀값은 절반 이하로 내려야한다니 앞날이 걱정된다. 농사를 지어도 인건비와 농자재비가 충족되지 않거나 소비할 소비자가 없으면 농부는 일손을 놓아야 한다.

농민이 손을 놓고 십수 년 뒤 황금들녘이 폐허가 된 잡초로 무성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노력하고 FTA 파고를 넘어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의 과제처럼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비슬산에서 상큼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구절초·들국화·쑥부쟁이 꽃향기도 실려 있다. 농촌의 가을! 아직은 넉넉하다. 한여름 땡볕도 아픔을 안겨줬던 태풍도 그 속에 알알이 스며들었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시야에 누런 들판이 들어온다. 농민들이 흘린 땀방울 냄새가 구수하다. 허수아비가 황금들녘을 지키고 할 일 많은 농부의 바쁜 손놀림과 콤바인소리가 요란하다.

농민이든 도시민이든 우리의 마음에도 참새가 찾아오는 황금들판 같은 넉넉함으로 풍성한 가을을 맞이해 보자. 졸시 '허수아비'를 잠시 가슴에 담아본다. 바쁜 삶의 틈바구니에서 텅 빈 들녘의 외로운 허수아비가 되지 않기 위해….

'허수아비는/ 자신이/ 허수아비인 줄 모른다// 낡고 허름한 옷을 걸쳐도/ 들녘이 온통 황금물결이라/ 가난한 줄 모른다// 날마다 배고프다 찾아오는/ 참새를 쫓았으나/ 이내 황금 들녘은 사라지고…// 참새가 찾아오지 않는 들녘/ 자신의 외다리가 초라해 보일 때/ 외로움을 안다// 찬바람이 낡은 옷깃을 스미고/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때/ 허수아비인 줄 안다' 박재희(시인·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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