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과정 : 궁극적인 의미 찾기
전략적 글읽기의 마지막 단계에 왔다. 바로 제시문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일이다. 앞의 분석에서 연암은 화이론자이기도 하고 반화이론자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면 화이론자이기도 하고 반화이론자이기도 한 연암 의식의 이중성이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한 방향은 어디일까? 결국 여기에서 의 궁극적인 의미와 만난다.
사실 화이론(華夷論)이란 중국이 주변의 국가에 대해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스스로와 주변 국가를 구별하고자 설정한 이론이다. 즉, 중국이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지이며 중국인이 모든 종족 중에서 가장 우수하며 중국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문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암은 그러한 화이론을 나름대로 해석한다. 존주(尊周)는 존주이고 이적(夷狄)은 이적이라는 의 주장은 이러한 논의를 대변한다.
그러나 존주는 스스로 존주이고 이적은 스스로 이적이다. 중국의 성곽과 건물과 인민들이 예와 같이 남아 있고 정덕, 이용, 후생의 도구도 파괴된 것이 없으며, 최, 노, 왕, 사의 씨족도 없어지지 않았고, 주, 장, 정, 주의 학문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삼대 이후의 성스럽고 밝은 임금들과 한, 당, 송, 명의 아름다운 법률, 제도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저들이 이적일망정 실로 중국이 자기에게 이로워서 길이 누리기에 족함을 알고 이를 빼앗아 웅거하되 마치 본시부터 지니었던 것같이 한다.
존주론(尊周論)은 주를 존중하는 데만 쓰이고 이적의 문제는 이적에서만 쓰인다는 것이다. 즉, 주를 존중하는 것이 이적을 멸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적의 훌륭한 점은 그것대로 가치 있는 점이라는 걸 강조한다. 그렇게 하여 화이론이 모두 부정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청이 비록 이적이지만 중화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 문화의 이로움을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중화의 문화는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이른바 상대주의적 시각이다. 화이론의 문화적인 측면은 그것대로 유지하면서 청의 긍정적인 측면도 인정해주는 시각이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옳다고 여기는 진실과 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이 달라야 했던 질곡의 시대를 산 연암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 다음 서술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이적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으려하거든 하물며 삼대 이후의 성제, 명왕과 한, 당, 송, 명 등 여러 나라의 고유적인 옛 것인데 어떨 것이냐?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힘을 분히 여겨서 중화의 가히 숭배할 진실 그것마저 물리친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중화의 가히 숭배할 진실' 그것이 무엇일까? 문맥으로 보아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는 것이다. 헛된 명분을 위하여 북벌을 한답시고 인민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인민의 적개심을 이용하는 당시 사대부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암 자신이 병자년의 수치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연암은 도처에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을 토로한다. 문제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이적을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를 열어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 등으로부터 공업, 상업에 이르기까지 배우지 않음이 없고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인민들을 이롭게 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하게 하여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연후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전체, 나아가 의 전반적인 의미를 파악해 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적(여기서는 청)을 물리치려면 적대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적의 좋은 점을 배우고 이적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 국력이 그들보다 나아진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라는 논지이다.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북학론의 교차점이 여기에 있다. 연암은 '합변(合變)'을 중시한다. '합변'을 부분적인 요소가 합쳐져서 부분적인 요소가 가지지 못한 새로운 뜻을 만들어내는 변화라 규정한다면 여기에 '합변'의 중심축이 놓인다. 존화양이의 북벌론과 실사구시의 북학론, 다시 말해 기존 도덕과 새로운 경제 현실의 절묘한 결합이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북벌의 지름길이 북학에 있으며 북학도 북벌이 내재되어 있지 않을 때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족주의적 입장이다. 따라서 이들은 결코 평행선을 달리는 두 직선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면서 조화되어 결국 우리 인민에게 주는 이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인민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라면 존화양이의 북벌론이든 실사구시의 북학론이든 모두 족하다는 것이다. '우리 인민을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이 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연암의 궁극적 의도이다. '사(士)'로서 민중과 집권층의 중간에서 올바른 임무를 수행하려는 연암의 사회적 입장이 여기서도 확인되는 셈이다.
글 잘 짓는 사람은 병법도 잘 알 것이다. 글자는 병사에 비유할 수 있고 뜻은 장수에 비유할 수 있으며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는 전쟁터의 성첩과 같다. 그리고 글자를 묶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이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마치 군대의 대오, 행진과 같다…. 저 자구의 우아하고 비속함을 평하고 높낮이를 논하는 사람은 합변(合變)의 기틀이 승리의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합변의 기틀은 그 시대에 있는 것이지 고법(古法)에 있는 것은 아니다.(박지원, 부분)
무릇 장평의 병졸은 그 용맹이 옛적과 다르지 않고 활과 창의 예리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는데도 염파가 거느리면 승리할 수 있고 조괄이 거느리면 갱살을 당하고 만다. 그러므로 용병을 잘하는 자는 버릴 병졸이 없고 글을 잘하는 자는 따로 가릴 글자가 없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만나면 괭이, 쇠스랑을 들어도 굳세고 사나운 병졸이 되고 헝겊을 찢어 장대 끝에 달더라도 사뭇 정채(精彩)가 새로우며 진실로 그 이치를 터득하면 집안의 일상용어도 오히려 학관에 열거되고 동요나 상말도 이아(爾雅)에 속하게 될 것이다.(박지원, 부분)
문장에는 방도가 있으니, 소송하는 자가 증거를 제시하듯 해야 하고 행상이 자기 상품의 이름을 외치듯 해야 한다. 비록 사리가 분명하고 정직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증거가 없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글을 쓰는 사람은 이것 저것 경전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관호(官號)와 지명을 서로 차용할 것이 못된다.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쳐댄다면 비록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나무 한 단을 팔지 못할 것이다.(박지원 부분)
한준희(대구통합교과논술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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