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戰利品

1798년 영국이 인도와 교통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시작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서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유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기원전 196년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를 찬양한 공덕비인 '로제타 스톤'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이 비석과 함께 약탈한 수많은 이집트 유물들을 영국군에 고스란히 빼앗기고 만다. 프랑스군의 약탈품이 영국군의 戰利品(전리품)이 된 것이다.

전쟁에서 이긴 로마군이 개선할 때 행진의 선두에 내세운 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 아니라 포로와 노획한 전리품이었다. 전리품은 승리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하게 취급됐다는 증거다. 하지만 전리품은 패자의 입장에서는 치욕의 상징이다.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세운 전승기념탑 '京觀(경관)'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포로나 금은보화처럼 당장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재물이 아니라 수많은 적의 목을 베어 쌓아 놓은 것이다. 고구려 영류왕이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경관을 허문 것도 중원 사람들이 이를 얼마나 치욕으로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군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1823~1871)의 장수기가 최근 귀환했다는 소식이다. 전리품으로 태평양을 건너간 지 136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당시 강화 광성진을 수비하던 600여 명의 조선 군졸들은 로저스 제독이 지휘한 1천여 명의 미 해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어재연 장군 형제를 비롯, 300여 명이 전사하고 '帥(수)'자를 새긴 장수기를 빼앗겼다. 그동안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오다 이번에 10년간 장기 임대 형식으로 되돌아왔다.

이 장수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후세 사람인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없지만 당시 조선에 국기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수기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주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장수기 귀환에 힘을 보탠 미국인 토머스 듀버네이 한동대 교수의 증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마치 포로처럼 둘둘 말아서 박물관 바닥에 내려놓은 기를 보고 놀랐다. 장수기는 미 해군의 용기를 상징하는 전리품일지 모르지만 그 깃발 아래서 전사한 조선 병사들의 용기의 상징이기도 하다." 전리품이 부끄럽고 쓰라린 역사의 결과물이지만 이에서 얻는 교훈은 결코 작지 않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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