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 만씩 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그렇겠지, 가을 바닷가에는 지난여름 우리가 남겨두고 온 발자국들이 모여 살고 있겠지. 저이들끼리 모여 외롭고 쓸쓸한 시간 견디고 있겠지. 버려진 뒤쪽 풍경은 늘 안쓰럽다. 뒤쪽 풍경을 뒤적이는 이는 외로운 사람이다. 외로운 사람이 남겨놓은 '토막말'을 다른 외로운 사람이 읽고 진저리친다.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 막말.
이 막말이 왜 아름다운가. 그리움의 밑바닥까지 닿아본 사람은 알리라. 이런 무식한 막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밑바닥에 닿은 마음은 다른 밑바닥 마음을 알아본다. 외로움과 외로움의 연대, 아픔과 아픔의 동맹. 아픈 마음들끼리 모여 견뎌내시라, 그리움의 막장에 닿아있는 외롭고 쓸쓸한 시간들을.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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