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랑한데이)이젠 볼 수 없는 꿈 많았던 우리 남동생

70년대 참으로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까만 타이어표 고무신에 개구리 올챙이를 가득 잡아들고서 헤헤거리며 들판을 뛰어다니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소년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대견해 했었지요.

"우리 울보가 드디어 학생이 되는구나." 소년의 별명이 울보였거든요.

기쁨도 잠시, 그 아버지는 그해 여름 갑작스럽게 찾아 온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렸습니다. 돈이 없어, 병원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도 소년은 씩씩하고 아주 착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대구공고 토목과에 입학하던 날, 시골동네에서는 경사 중에 경사라며 작은 막걸리 잔치가 있었답니다.

어느덧 다 자란 소년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9급 지방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이나 낳았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항상 기쁨에 차 있었지요.

이제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고,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추석 전날 갑작스레 쓰러진 소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습니다.

47세. 너무나 짧은 삶을 그 소년은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남겨진 모든 이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그는 가버렸습니다.

하고픈 일,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그 소년, 어쩌면 아직도 남겨진 가족, 홀어머니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가던 길을 되돌아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지을지도 모릅니다.

"엄마예, 잘 노시는 게 저희들 도와주는 겁니데이. 오늘도 잘 노이소."

생전에 소년이 자주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오늘도 소년의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이거는 아이데이 이럴 수는 없는기라."

가을이 깊어가고 곧 겨울이 오겠지요. 소년이 있는 그곳 겨울은 얼마나 추울까요.

너무너무 보고 싶은 남동생의 이야기였습니다. 큰누나

박성자(대구광역시 북구 침산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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